[41~44개월] 이젠 내가 겪을 수 없는 일
지난밤의 개떡 같았던 회식. 하지만 더 개떡 같은 건, 그다음 날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제 회식 때 꽐라가 된 권팀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팩트 융단 폭격을 날렸지만, 사실 나는 상관없었다.
나? 어차피 권팀장과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었다. 심지어 어제 나한테 했던 융단 폭격은 따지고 보면 융단 폭격이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들은 것만 같은 따스함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수석과 사과녀의 상황은 다르지 않은가? 권팀장이 본인들을 그 정도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텐데, 그런 얘기를 듣고도 권팀장과 제대로 잘 지낼 수 있느냔 말이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도 같았다. 그 세 명이 갑자기 싸운다거나 하는?
그렇게 약간 불안한 기대감을 안고 출근한 회사. 권팀장은 전날 과한 음주의 여파로 약간 늦은 시간에 출근했다. 내가 아는 한, 권팀장은 절대 필름이 끊어지지 않는 타입이었다.
“아...안녕하십니까. 다들.”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오는 권팀장의 표정이 어쩐지 조금 뻘쭘해 보였다. 그의 표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100%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인사에 권팀장을 바라보는 김수석과 사과녀. 이제 그들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팀장님, 어제 무리하셨는데 오늘 그냥 휴가 내고 쉬시지. 괜찮으세요?”
능구렁이 김수석은 권팀장의 폭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아주 어른스러운 대처를 선보였다.
그렇지만 사과녀. 당신은 멍청하단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 일을 그냥 넘기진 않겠지?
“팀장님~어제 회식 너무 재미있었어요오~컨디션은 괜찮으세요오? 물 한 잔 드릴까요오?”
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누구도 권팀장의 폭언에 대한 반기를 들지 않았다. 나와 옥반지는 서로를 쳐다보며 ‘역시 대단들 하다.’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게 진짜 어른들의 사회생활인가?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그냥 덤덤한?
“아, 팀장이 그렇게 취하면 안 되는데.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뭐 실수한 거라도...?”
“아닙니다. 실수하신 거 없어요. 담배?”
그렇게 권팀장과 김수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배를 피우러 떠났다.
“언니, 다들 대단하다. 그지?”
“그러게. 와. 진짜 대박.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쩌네 다들.”
“저게 진짜 어른인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김수석도 그렇고 사과녀도 저런 말 들어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지. 지들이 능력이 있어야 불합리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권팀장 아니면 나가리인데 저렇게 살아야지 뭐.”
언니의 분석에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어쨌든 지난 회식은 그렇게 시시하게 지나갔다.
“언니, 나 1층에 좀 갔다 올게. 행사할 때 쓴 짐이 거기 있어서 가져올게.”
“나 지금 같이 못 가는데...상혁씨랑 같이 가. 안 무거워?”
“괜춘. 나 혼자 갔다 올 수 있어. 다녀올게.”
나 혼자 다녀온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1층에서 마주한 짐은 내 생각보다 꽤 많았다. 상혁씨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어! 김현수 선임님. 안녕하십니까!”
“어? 만수씨. 안녕하세요?”
만수씨였다. 그는 나를 보면 늘 밝게 인사를 하는 싹싹한 계약직 남자 직원이었다. 만수라는 조금 연식이 있는 이름과는 다르게,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멀리 있을 때도 뛰어와서 인사를 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꼭 와서 짐을 함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키도 훤칠하고 인상이 좋은 편이었다.
“선임님, 근데 왜 맨날 선임님은 무거운 걸 들고 다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부탁할게요. 제 생각보다 짐이 많네요. 같이 들어요.”
“아니에요. 혼자 드는 게 더 편해요. 거기 계시면 다쳐요. 그냥 이쪽 와서 편하게 걸으세요.”
“아...진짜 감사해요. 진짜 이럴 때 회사에서 도와주는 사람 만수 씨밖에 없어요.”
“진짜요?”
“네. 만수씨가 우리 회사에서 제일 착한 것 같아요.”
“에이~ 아니에요. 선임님이 좋은 분이니까 저도 이러죠.”
“와. 만수씨 사람 볼 줄 아시네.”
그렇게 그날도 만수씨는 짐을 들어 내 자리까지 옮겨 주었고, 그때까진 그 날 그렇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날 오후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어떤 직원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울고 있던 그녀는, 얼마 전 전문대를 중퇴하고 고졸 전형으로 입사한 직원으로 나이가 나보다 한 두 살 어렸다. 입사 전에 영화관에서 줄곧 알바만 했다던 그녀는, 서비스직 알바를 오래 해서인지 언제나 씩씩하고 당찬 사람이었다.
“선정씨, 어머...왜 울어요?”
“흡흐...으...읍...선임님...”
선정씨는 우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서 선정씨를 달래주고 있는 다른 직원 민희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민희씨, 선정씨 왜 이러는 거예요? 응? 어디 아파요?”
“하...선임님...아...진짜...선정아, 말해도 괜찮아?”
민희씨가 물어도 선정씨는 울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평소 선정씨랑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회사 화장실에서 몇 번 울어봐서 아는데 회사 화장실에서 이렇게 오열하고 있다는 건 회사에서 엄청 힘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좀 더 오래 회사생활을 하고, 좀 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선정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난 선정씨가 성희롱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꼭 도움을 주고 싶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선정씨는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선정씨, 아픈 거 아니면 괜찮으면 카페 갈래요? 화장실에서 이러면 사람들 계속 들어올 텐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으면 도와줄게요.”
“선임...선임님, 바쁘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괜찮아요.”
그렇게 우리는 비어 있는 회의실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선임님...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나 진짜 너무 놀랐어요. 무슨 일인 건데요?”
“하...선임님...혹시 방만수씨 알아요?”
“선정씨네 팀에 있는 만수씨요? 그 착한 사람?”
“그 사람이...착해요?”
착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 얘기가 나오면 착하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올 정도로 그의 웃는 모습이나 행동은 순박하고 착했다.
“왜...지금 우는 거 그 사람 때문이에요?”
“저...”
진정된 듯 보이던 선정씨는 만수씨 얘기를 하면서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정씨...어떡해...계속 눈물이 나서...”
선정씨가 우느라 잠깐 대화를 멈춘 그 몇 분. 난 진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만수씨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선임님...저 그 사람이랑 같은 팀이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저를 너무 싫어해요. 맨날 불러내서 욕하고, 물건 던지고 그래요.”
귀를 의심했다.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진다고? 만수씨가 물건을 날라주는 게 아니라 물건을 던진다고?
“네? 만수씨가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한다고요?”
“선임님도 못 믿겠죠? 제가 더 이미지 안 좋죠...?”
“그건 아니야. 근데 왜 그러는 건데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도 잘 몰라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도 궁금해요.”
그 날 오전까지만 해도 내 짐을 옮겨주던 만수씨가, 욕을 하며 물건을 던지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선정씨는,
“아마, 선임님한테는 저한테 하는 것처럼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선임님은 좋은 대학 나오셨고 정규직이고, 회사도 오래 다니셨고, 일도 완전 잘 하시고...선임님네 동기들이 제일 유명하고...저는 아니잖아요. 아직 잘하는 일도 없고...”
선정씨의 말에 공감이 안 가다가도, 생각해보니 나도 어느덧 짬이 조금 차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여전히 어린 편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한 뒤에 선배들이 너무 많이 퇴사를 하는 바람에 신입사원 입사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엄청난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몇 년 늦게 입사했으면서도 대충 겉모습을 보고 무작정 반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근데 그쪽은 입사 언제 하셨죠?”라는 질문을 던지며 쪽 줄 정도는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이런 것 때문에 나한테는 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선정씨에게는 욕을 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근데 그런 게 많이 중요한가?…”
“저도 진짜 모르겠어요. 선임님...제가 이런 일 너무 자주 있어서 한 3번째부터는 그냥 회의실 데리고 갈 때마다 녹음기 켜 뒀거든요. 이거 들어보실래요? 저 너무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팀장님한테 말할까 고민도 했는데 책임님한테 말하니까 별 거 아니라고 참으라고 해서...근데 제가 생각했을 때 이거 진짜 별 거 아닌 게 아니거든요...들어보실래요?”
책임님이 별 거 아니라고 했으면, 진짜 별 거 아닌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녹음 파일을 재생했고...난 그 녹음 파일을 듣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녹음파일은 만수씨 목소리로 시작했다.
“야, 이 년아. 너 상판대기 진짜 못 들고 다니게 해 줄까? 존나 열 받네. 한 주먹에 끝낼 수 있는데 끝내줄까?”
분명 만수씨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