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는 그가 착한 줄 알았다_(2)

[41~44개월] 이젠 내가 겪을 수 없는 일

by 하이히니

“야, 이 년아. 너 상판대기 진짜 못 들고 다니게 해 줄까? 존나 열 받네. 한 주먹에 끝내줄까? 어?!!”

파일에서 흘러나오는 만수씨의 목소리를 듣고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는 만수씨가 아니었다.


“욕하지 마시고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고칠게요.”

“뭐? 고친다고? 지금 너 존나 쫄았지? 당당한 척하는 거 개웃기네? 나는 그냥 너 보면 기분이 ㅈ같은 건데 그걸 어떻게 고칠 건데? 어? 어떻게 고칠 거냐고!”

"저 이거 녹음하고 있고요. 계속 이러시면 저 신고할 거예요."

"해봐. 녹음. 누가 편이라도 들어준대? 그럴 것 같아? 웃기는 년이네."


쿵!쿵! 녹음 파일에서는 중간중간 쿵쿵 치는 소리도 들렸다.


“계속 이러시면 저 나갈게요.”

“뭐? 나갈게요? 너 정규직이니까 뭐 된 것 같냐? 고졸이? 뭘 할 줄 안다고 정규직이래? 그래 나가라? 나가요 주제에?”


만수씨가 선정씨에게 얼마나 욕을 많이 했는지, 20분 남짓한 그 녹음 파일을 끝까지 다 듣기도 힘들었다. 선정씨 핸드폰에는 그런 파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선정씨. 근데 중간에 이거 쿵쿵 거리는 거, 무슨 소리예요?”

“주먹으로 쿵쿵거리거나 발로 캐비닛 차거나...그런...”

“이거 책임님한테 들려 드렸는데 별 거 아니라고 했다고?”

“네...그냥 참으라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회사 입장에서도 더 오래 같이 일할 사람은 선정씨였고, 내가 아는 한 선정씨 팀에 있는 그 책임님은 꽤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 줄 타입은 아니어도 그냥 참으라고 말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제대로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분명...


“근데 책임님이 그럴 타입이 아닌데...왜 그러시지?”

“저도 책임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근데 만수씨는 퇴사하면서 회사 신고할 거 있으면 신고하고 갈 수도 있다고 건드리지 말자고...조금만 참으라고...”

“선정씨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다른 회사 갈 수도 없는데 곧 그 사람 계약 끝나니까 참아야 하나 싶고...”


선정씨를 달래주고 자리에 돌아왔고, 그 날 퇴근하면서 또 만수씨를 마주쳤다. 그는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선임님! 퇴근하십니까? 늘 늦게 퇴근하시더니 오늘은 그래도 일찍 하시는 것 같네요!”

“아...네”


티 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가 너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내 앞에서는 저렇게 웃다가 뒤에서는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선정씨에게 그 난리를 친다는 게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선임님, 많이 피곤하세요? 좀 만 더 힘내십시오!”

“네...그럼...”


나는 내 눈에 선하고 좋은 사람이면, 그냥 그 사람은 선하고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던 만수씨도, 내게 친절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의 판단 속에, 나에게는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선정씨에게는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씁쓸했다.


하지만, 씁쓸함과 별개로 내 머릿속엔 뭔가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맴돌았다. 본인이 욕하고 있는 것을 녹음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당당한 만수씨의 태도. 그리고 선정씨에게 참으라고 하는 그 책임님의 태도. 참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나중에 정말로 선정씨가 감사실이나 외부에 이런 일을 신고해버리면 참으라고 했던 책임님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책임님은 그 정도 판단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그냥 참으라고 했을까? 뭔가 숨겨야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만수씨가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선정씨는 그 이후에 만수씨에게 폭언을 당할 때마다 나에게 본인 한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선임님...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이렇게 시작한 한풀이는 몇십 분이고 계속되었고, 가끔은 퇴근한 이후에도 연락이 오곤 했다.


이 일에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정식으로 신고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선정씨, 근데 차라리 이거 감사실에 바로 신고하는 건 어때?”

“근데 곧 방만수 계약 만료되거든요. 그때까지 그냥 참게요. 책임님이 조금만 더 참으라고...”

“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책임님 원래 그러실 스타일 절대 아니거든? 이 정도 일에 참으라고 할 사람 아닌데 왜 그러는 것 같아? 같은 팀이면 좀 알 거 아니야. 혹시 만수씨가 뭐 약점 잡은 거 있어?”

“아... 사실 책임님이 제가 일을 많이 못하긴 한 대요. 그래서 방만수 연구원이 저 때문에 업무 다시 처리하고 그랬다고...화났을거라고...제가 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선정씨. 만약에 정말 선정씨가 일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 못한다고 저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닌 것 같지 않아?”

“그렇긴 한데...저는 고졸 전형이라 다른 팀 가서도 제대로 일할 수도 없거든요. 지금 이 팀에서 적응하고 있고 일할 수 있는데 책임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선정씨는 만수씨의 계약 만료까지 이 일들을 참아내기로 결정했고,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없었다.


그러다, 얼마 뒤 계약 만료를 앞둔 만수씨가 갑자기 내 자리로 찾아왔다.

“선임님, 안녕하십니까...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만수씨? 무슨 일 있어요?”

“넵...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네? 저요?”

“네. 잠깐 회의실로...아니면 카페 가실래요?”


당시 선정씨에게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만수씨와의 회의실=폭언의 방 감금’ 같은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터였다. 그와 단 둘이 회의실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아...카페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왜요?”

“넵. 그럼 카페에 가서 제가 쏘겠습니다.”


다른 팀이던 만수씨가 나를 이렇게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극도로 긴장이 되었다. 혹시 내가 요즘 선정씨랑 따로 연락을 하는 걸 알고 해코지를 하고 싶은 건가?

“선임님, 커피 뭐 드시겠습니까?”

“저는...미숫가루...”

“넵.”


최소한 카페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만수씨가 나에게 허튼 짓은 못할 것 같았다.

“근데...무슨 일이에요?”

“선임님, 사실 제가 곧 계약 끝나서 회사를 나가야 하는데요.”

“그래요?”

“전 여기 정규직이 꼭 되고 싶은데,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저희팀은 다 엄청 오래전에 입사한 분들이셔서...”

“그 팀에 제 동기들도 있잖아요?(제발 나랑 엮이지 말아 줘.)”

“아. 그죠. 근데 저희팀 선임님들은 나이가 많으셔서 여쭤보기가 좀 죄송스럽더라고요. 근데 김현수 선임님이랑은 저랑 동갑이기도 하고...편하게 여쭤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준비하면 정규직 될 수 있을까요?”


“저도 입사한 지 꽤 지나서...제가 입사했을 때랑 시험 유형이 좀 바뀌었던데...”

“아. 그럼 시험 말고 스펙 어느 정도인지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 정말 이런 거 여쭤봐서 너무 죄송합니다. 근데 그만큼 너무 간절해서...제발...”

“제가 말씀드리는 건 별 문제 아닌데...요즘은 예전만큼 스펙 중요하지도 않고 이전하고 나서 경쟁률도 많이 떨어져서 그냥 열심히 하시면 되지 않을까...싶은데...”


굳이 그와 많은 정보를 교환하며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최대한 어물쩍 상황을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는 간절한 얼굴로 내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만 알려달라고 사정사정했다.


“네. 알겠어요. 근데 스펙이면 뭘 알려드려야 좋을지...?”

“진짜. 선임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잘 되면 꼭 코스로 대접하겠습니다. 학교랑 학점, 토익, 뭐 자격증...대외활동 뭐 하셨는지, 혹시 자소서도 보내주실 수 있으면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입사하실 때 나이는 몇 살이셨어요?”


난 그의 간절함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의 스펙을 줄줄이 고했다. 하지만 불안한 건...내가 얘기를 해주면 해줄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와...선임님 근데 진짜 대단하십니다...”

“네? 아니에요.”

“정말 어릴 때 입사하셨구나...그리고 스펙도 좋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냥 이건 참고용으로...”

“아...저는 정규직으로 입사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말씀 들어보니까. 하...”


“만수씨, 근데 그냥 이건 참고용으로만...예전이랑 많이 달라져서...”

“근데 대졸이 정규직 되려면 이 정도는 돼야 되는 게 맞죠.”

“네?”

“대졸은 이렇게 힘들게 입사하는데, 선임님. 고졸들 보면 화나시겠다. 안 그러세요? 선임님이랑 비교도 안 되는 애들이 선임님이랑 똑같은 대우받는 게 웃기지 않아요?”


이때부터 대화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것 같았다.


“네?”

“고졸로 입사한 사람들이랑 선임님이랑 스펙, 업무 능력 다 비교 불가잖아요. 근데 똑같이 정규직인 게 말이 안 되는데...”

“아...저 칭찬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데 어차피 고졸로 입사하면 연봉 테이블도 다르고...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고 얼굴도 약간 붉어졌다.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죠. 원래였으면 고졸들은 입사도 못하는 거였는데, 연봉 테이블이 다르더라도 걔네들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아니에요?”

“만수씨...왜 그러세요...?”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만수씨는 급히 정신을 부여잡는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아 놀라셨죠? 아...죄송합니다. 아 선임님 스펙이 저랑 너무 차이가 많이 나서...답답한 마음에 갑자기...아 죄송합니다.”

“만수씨. 채용 트렌드 자체가 예전보다는 스펙이 중요하지 않은 쪽으로 가고 있어서.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절대적으로 비교하지 마시고, 열심히 준비하세요. 저는...해야 될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네요.”

“아. 선임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수씨는 선정씨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다기보다 ‘고졸’인 선정씨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약간의 확신이 들었다. 그가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정규직이 되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리한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그 방법은 회사에 피바람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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