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정규직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41~44개월] 그가 선택한 방법

by 하이히니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은가? 회사에 출근했는데, 뭔가 모르게 분위기가 평소랑 조금 다를 때 말이다. 딱 꼬집어 어떤 점이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모르긴 몰라도 뭔가 다른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는데 사람이 그런 묘한 분위기를 읽어낸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 출근하자마자 저런 싸한 기분이 들 때면, 회사에 좋은 일이 있는 경우보다 나쁜 일이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뭔지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 들고, 분위기가 약간 어두웠다.

“상혁씨, 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

오셨어요? 잘 모르겠는데 9시 되기 전부터 팀장님들 왔다 갔다 하시고, 다른 층 사람들도 왔다 갔다 하네요? 아마 지금도 저기 안쪽 회의실에 있는 것 같은데...”

“뭐지? 다른 층 누구요?”

“가끔 선임님 짐 들어주는 그 아...이름이 뭐더라...?”

“아 혹시, 만수 연구원님?”

“네. 그분이랑 그 팀 팀장님도...”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9시도 되기 전에 벌써 회의실에 들어가 있고, 이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한 걸까? 그때, 만수씨가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만수씨가 본인 팀장님한테 정규직 되고 싶은데 어떻게 자리 없나...그런걸 물어봤나? 그래서 팀장님이 인사팀에 알아봐 주려고 하나? 최소한 언제 공고가 나오는지라도?’


그러려니, 싶었지만 그래도 저 정도 일이면 이렇게 분위기가 무거울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부탁하고 알아보려고 하는 입장에 출근 시간도 되기 전인 9시에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납득이 되진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 하고 일에 집중을 하기는커녕...온 신경이 회의실에 쏠려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내게 만수씨는 그저 훈훈한 느낌에 키가 크고 친절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다른 직원에게 폭언을 한 것도 알게 되었고 정규직이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렇게 한 10시쯤 되었을까? 안쪽에 있는 회의실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선 만수씨, 만수씨네 팀장님, 인사팀장, (심지어) 권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표정으로 줄줄이 나왔다. 특히 권팀장은, 회의를 하면서 머리를 몇 번 쥐어뜯었는지, 꽁지머리가 가지런하지 않고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손가락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저게 무슨 조합이야?’, ‘뭐야?’, ‘무슨 얘기한 거야?’, ‘아는 사람 있어?’ 등등...


평소라면, 주변에 있는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대강은 알고 있는데, 그날은 정말 저 조합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권 팀장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김선임, 잠시만.”


권팀장은 보통 나를 김현수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를 김선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뭔가 불길한 징조같이 느껴졌다.

넵...”


회의실엔 나와 권팀장 둘 뿐이었고, 권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만수랑 친하다며?”

“네? 제가요?”


진짜 하나도 안 친한데, 뭔가에 휘말릴 것 같아서 순간 엄청 긴장이 되었다.

“아, 안 친해? 그럼 말고...”

“근데, 왜요?”

“걔 대단하던데?”

“뭐가요?”

“방금 걔 여기서 딜하고 갔다.”


딜? 내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권팀장은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고하기 시작했다.


“걔가 걔네 팀에서 지출 담당한다며. 사람들이 지출하는 건 온갖 걸 다 시켰나 봐? 근데 보다 보니까 행사나 뭐 만들고 그럴 때마다 입찰공고 없이 수의계약으로 한 사람한테만 일을 시켰다는 거야.”

아...그래요?”

“근데, 그래서 올해만 해도 그 사람이 몇 천만 원을 받아갔는데...그 사람 이름이 나정인가 그렇다는 거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다.

“근데, 그 나정이라는 사람이 이팀장(만수씨네 팀장) 마누라다 이거야.”

“네? 진짜로요?”

“그래서 지금 만수인가 천수인가 하는 놈이 이팀장한테 감사실에 찌를 거니까 정규직 시켜달라고 하는 중이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면서 본인 팀장이랑 그런 식의 딜을 한다고?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나정이라는 사람이 이팀장 부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그럼 그 둘이 해결을 할 것이지 쓸데없이 권팀장이랑 인사팀장 같은 사람들은 왜 들어가 있는 건데?


“근데...나정이라는 사람이 누군진 어떻게 알았는데요?”

“이팀장이 자기 마누라 이름 특이하다고 외자라고...지나가는 말로 얘기한 적이 있나 봐.”


어휴...부인한테 일을 몰아서 줄 거면 비밀이라도 잘 지키든가...자기 입으로 말 안 해도 문제 될 판에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근데, 그 안에 인사팀장님이랑 팀장님은 왜 들어갔는데요?”


이때부터 거의 코미디인데,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면. 사실 요 며칠 동안 만수씨는 이팀장의 약점을 잡기 위해 지속적으로 녹음을 해왔다고 한다. 그 녹음 파일에는, 자신의 부인에게 수의계약으로 일감을 몰아주는 것이 부적절한 행위임을 알고 있다는 내용, 그걸 은폐하려고 하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상황 자체도 문제인데, 그걸 알고서 했다는 녹음파일까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팀장은 멘탈이 붕괴되었고, 어젯밤 인사팀장에게 전화해서, 이 상황을 전달하며 “혹시 만수를 정규직으로 만들어 줄 방법은 없는 거야?”라고 읍소했다고.


그럼 권팀장은 도대체 왜 들어가게 된 것인가? 사실상 권팀장이 거기에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는데, 인사팀장이 만수씨와 이팀장이 부담스럽다며 함께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 그런 조합으로 회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나...?


“근데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 건데요? 그리고 전 왜 부르셨어요?”

“아, 난 또 걔가 얘기하다가 너 얘길 하길래 친한 줄 알았지. 가까운 사이면 설득 좀 해보라고.”

“제 얘기 뭐요?”

“그냥...김선임이랑 얘기해봤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규직이 되기 힘들 거 같다고. 그래서 이렇게라도 협상하겠다고 그러던데?”


거기서 또 굳이 내 얘기를 할 건 뭐람...


“팀장님...근데 전 그 사람이 제 스펙 물어봐서 그거 말해준 게 다예요...”

“그래...뭐...이팀장이 알아서 해야지 뭐...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일처리 하라고 했나...어휴 멍청하긴.”


오랜만에 권팀장이 맞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권팀장의 여러 일처리를 생각해봤을 때 이팀장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는 좀 의문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권팀장의 꽁지머리를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내가 권팀장과 회의실을 다녀온 이후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지만 내가 여기에서 잘못 얘기했다간 진짜 큰 화를 당할 것 같아서, 그냥 업무 얘기를 했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그 뒤로, 이팀장은 부탁할 것이 있는지 인사팀장을 계속 찾아왔다. 하지만 이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인사팀장은 만수씨가 정규직이 되고 싶다면 정식으로 지원해서 채용 절차를 거치는 수밖에 없다고 거듭 안내할 뿐이었다.


만수씨의 계약 만료가 다가올수록 이팀장의 안색은 수척해졌다. 이팀장은 원래도 빼빼 마른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 빠질 수 있는 살이 있기는 할까 싶었던 사람인데 계속 살이 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만수씨의 계약 만료일이 되었다. 난 회사를 출근하기 전에 잔뜩 긴장했다. 여태까지 특별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으면, 오늘은 뭔가 난리가 날 것 같은데, 최소 1인 시위 같은 거라도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회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만수씨는 잔여 휴가를 사용한다고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고, 그다음 날도 아무 일도 없었다.


만수씨가 저 정도로 칼을 뽑아 들었으면 무가 아니라 사람 목이라도 벨 기세였는데,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끝난다는 건...뭔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던 나는, 여간해선 권팀장에게 이런 류의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정말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가서 물었다.


“팀장님, 근데 이팀장님이랑 만수씨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끝난 거예요?”


권팀장은 내 질문을 듣더니,


투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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