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4개월] 씁쓸한 소식과 희소식
“팀장님, 근데 이팀장님이랑 만수씨는 그냥 이렇게 끝난 거예요?”
내 질문을 들은 권팀장의 표정은 매우 흥미진진해 보였다. 심지어 내가 이 질문을 해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재 권팀장과 나의 사이가 거의 냉전 중에 가깝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권팀장은 내 질문에 화색이었다.
“김선임, 잠깐 회의실로.”
심지어 만수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에게 김선임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겼다.
“걔 그냥 이렇게 끝낸 거 아니야. 완전 골 때리는 새끼더만.”
“왜요?”
“걔가 이팀장한테 돈을 얼마를 받아갔는지 아냐?”
“네? 돈이요? 무슨 돈이요?”
“돈. 말 그대로 돈.”
권팀장은 평소에 이팀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약간 이 상황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살짝 비열한 웃음을 띄우며, 이 상황이 도무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 간의 이야기들을 얘기해줬다.
“인사팀장 입장에서 이팀장이 아무리 부탁한다고 해도 걔를 정규직 시켜줄 수 있겠냐? 정규직 하고 싶다고 자기 팀장 협박하는 놈을 어떻게 믿고 그런 무리수를 두겠냐고. 앞뒤 하나도 안 따지고 그렇게 막무가낸데”
하긴. 진짜 이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선택한 것 치고는 꽤나 부담스러운 방법이었다.
“근데, 이팀장도 이게 알려지면 징계는 확정이니까. 팀장에서 내려와야 되는 건 거의 확실한 거고. 그니까 이팀장은 인사팀장한테 죽어라 매달리지.”
인사팀장은 이팀장의 부탁을 (당연하게도) 모른 척하며 이팀장을 멀리했고, 어쩔 수 없이 이팀장은 만수씨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단다.
“만수씨, 기회가 지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추후에 기회를 엿보다가...내가 팀장으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들은 도와주고...그러니까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생각을 하는게...”
“팀장님, 그러니까 저 지금 정규직 시켜준다는 거예요? 만다는 거예요? 전 확실한 답이 필요한데.”
“내가 진짜 회사에 넣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확답을 줄 수 있겠어. 어? 어떻게 하면 마음이 좀 누그러지겠어?”
“왜 넣어줄 수가 없어요? 부인한테는 그렇게 계약 몰아줬잖아요. 그냥 저 감사실 가요? 감사실도 가고 뭐 요즘은 이런 거 신고하는 곳 엄청 많아요. 그럴까요 그냥?"
권팀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꽤 전부터, 만수씨가 이 일로 이팀장을 은근히 협박해왔다는 것이다. 이팀장이 만수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팀의 책임님(이팀장의 최측근 중 한 명)은, 최대한 만수씨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정씨에게 만수씨의 폭언을 참으라고 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그 이성적이고 똑 부러지는 책임님이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참으라고만 한다는 게 이상했는데, 수수께끼가 풀린 느낌이었다. 역시 뭔가 이런 비하인드가 있을 줄 알았다!!
“팀장님...다 알겠는데 근데 돈은 무슨 소린데요?”
“아! 돈! 뻔하잖냐. 만수인지 천수인지 걔도 여기서 정규직 되기는 글렀다는 거 알았을 거고, 결국 돈 달라고 했대. 이팀장한테. 그리고 또 이팀장 그 병신은 그 돈을 다 해주고.”
와... 이런 걸로 약점을 잡아서 돈을 뜯어내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한 편으론 씁쓸했다. 만수씨와 똑같은 일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조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을 때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던가?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어도 사람들이 나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조지지 않았던가?
흥미진진했던 이야기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만수씨가 더 나쁜 사람인지 이팀장이 더 나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팀장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이 만수씨가 아니라 나였다면...난 어떻게 되었을까? 오히려 이팀장한테 협박이란 협박, 불합리한 대우라는 대우는 다 받고 팀에서 쫓겨나듯 버려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만수씨는 그걸 빌미로 협박도 하고, 돈 까지...근데...
“근데, 도대체 얼마요? 얼마를 받았는데요?”
“너 이 얘기 그냥 너 혼자만 듣고 흘려라. 나도 인사팀장한테 들은 얘긴데, 천만 원 줬대.”
“천이요?”
와... 천? 나 같은 직장인이 그 정도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얼마나 고생스럽게 일해야 하는지...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근데, 그 천만 원을 만수씨는 한 방에...그렇게 가져갔다.
"팀장님, 이럴 거면 차라리 감사실에서 조사받는 게 낫지 않아요? 천만 원 너무 심한 대요?"
"천만 원은 몰라도, 나 같아도 그냥 돈 주고 상황 정리했을 것 같다."
"왜요?"
"걔 정말 미쳤잖아. 팀장한테 저러는 사람이 뭔 짓을 할 줄 알고...싸우려고 해도 저런 애랑은 절대 싸우면 안 되는 거야. 그냥 여기서 끝내는 게 낫지."
후...권팀장의 저 대답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권팀장에게 당해왔던 수많은 부조리함이 떠올랐다. 권팀장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던 거구나. 만수씨 같이 앞뒤 안 보고 달리는 사람은 피하고, 나 같은 사람은 조지고 또 조지고 끝까지 조지는구나.
내가 만수씨랑 똑같은 상황이었으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을 겪으며 괴로운 상황에 놓였을까...
씁쓸했다. 물론, 이 팀장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일에 대해 듣고 나도 한동안 꽤나 씁쓸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되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결국 저게 위너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반면, (이팀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권팀장은 이 상황을 꽤나 통쾌해하는 것 같았다. 부인한테 왜 일감을 몰아주냐고 욕을 했지만, 난 권팀장 같은 사람이 부인한테 일감을 몰아주는 게 나쁜 거라는 것은 알면서, 본인이 사과녀나 경우씨, 그의 동기들과 관련해서 했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좀 이상했다.
어쨌든, 권팀장은 오히려 이팀장 일이 터진 것을 기분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그의 그 홀가분한 마음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혹시 기억하는가? 권팀장이 경우씨의 동기들을 위해 감사실에 가서 그들의 결백을 주장했던 일이?
그 사건에서 오버하는 권팀장 때문에 감사실에서는 권팀장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감사실이 제대로 된 한 건을 해냈다.
감사실은, 권팀장에 대해 조사하다 권팀장이 지금까지 회식에 쓴 비용을 모두 조사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 하나.
권팀장은, 그루미 문이라는 특정 식당에서만 3000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 (권팀장이 그루미 문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대단하다 싶었다.)
특정 식당에서만 저렇게 돈을 많이 쓴 것도 이상했는데, 파면 팔수록 이상한 점들이 나왔다.
첫 번째, 그루미 문이 실제로 식사 메뉴를 제대로 파는 곳이 아니었다는 점. 그래서 그루미 문에 확인해 본 결과, 권팀장이 그곳에서 팔지 않는 음식을 시켜먹으면서 그루미 문에 수수료를 줬다는 내용을 감사실에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그곳에 가서 같이 회식을 했다고 이름이 적혀 있는 외부 기관 사람들 몇 명에게도 확인했는데, 실제로 그때 권팀장과 식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실은 이런 사실을 종합해서, 권팀장에게 그루미문에서 사용한 금액 전액을 환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권팀장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일 년 동안 쓴 금액도 아니고 이미 지난 일까지 다 환수하라고 할 것 같아? 감사실이랑 협의하고 얘기하다 보면 이거 이 정도 사이즈에서 훨씬 줄어든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감사실은 요지부동이었다. 꼴랑 팀장을 하면서, 온갖 권력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괴롭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 알량한 권력으로 패악질을 부리더니 정말 환수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흐르자, 그는 갑자기 반성 모드로 돌아섰다.
그가 했던 반성 중에 가장 골 때리는 것은 뭐였냐면,
“야, 너 오늘 너희 팀장 봤어?”
“권팀장? 왜? 아직 사무실 안 왔는데?”
“지금 니네 팀장 감사실 앞에 있는데, 미친... 삭발했어.”
“삭발?”
권팀장은 분명히 장발이었는데... 게다가 머리를 그렇게 열심히 길러서 곱게 묶고 다녔으면서...그 꽁지머리를 다 잘라버렸다고? 아니 꽁지머리를 자른 게 아니라 삭발을 했다고?
동기의 전화에 나와 옥반지는 급히 감사실 앞에 (몰래) 가봤고, 정말 권팀장의 머리는 민둥맨둥했다. 어제까지 그렇게 풍성하고 길었던 머리카락이 없었다.
그를 보고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다시 사무실에 돌아왔고,
“언니, 근데 권팀장은 자기가 삭발하면 감형될 거라고 생각하나?”
“뻔하지 뭐. 나 반성하고 있다. 넘어가 달라. 뭐 이런 거 아니겠어?”
“근데 저런 방식은 좀 이상하지 않아?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왜 저래?”
사람은 가끔 코너에 몰린 것 같고, 괴로운 상황에 놓였다는 생각이 들면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이상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걸 권팀장을 보면서 많이 느꼈다.
그가 삭발투혼까지 보여줬지만 회사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권팀장은 또다시 노선을 바꿨다. 차라리 본인과 함께 회식을 즐겼던 사람들과 돈을 나눠서 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다들, 들었지? 우리 회식...하고 그랬던 거... 3000만 원 뱉어 내야 된다는 거?”
권팀장은 차마 경우씨와 사과녀에게는 돈을 나눠내자는 말을 하긴 어려웠던 것 같고, 김수석과 다른 팀의 (본인 기준) 베프 두 명을 불렀다.
“아 들었죠. 권팀장 부담스럽겠어. 3000만 원 다 내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4명이서 분담을 하면 750만 원 정도니까...”
“4명? 누가 같이 분담해 줄 사람이 있는 거야?”
“다들...좀 섭섭하네. 우리가 회식할 때마다 같이 자주 갔는데, 어느 정도 같이 부담을 해야지.”
“에이, 아니지 그건. 내가 권팀장네 팀도 아닌데, 맨날 같이 간 것도 아니고. 정 그러면 김수석이랑 권팀장 둘이 같이 부담해. 그 대신에 김수석 평가 좀 잘 주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수석은, '김수석이랑 권팀장 둘이 같이 부담하라'는 말에 전쟁에 참전했다.
“근데 그건 아니죠... 어쨌든 권팀장님 법카고 감사실에서 권팀장님 기준으로 말했는데, 나까지 같이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그들의 반응은 권팀장의 기대와 너무나도 달랐다. 750만 원씩 함께 기꺼이 부담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권팀장이 평소에 좋은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그걸 같이 해주겠는가?
배신감을 느낀 권팀장은 더욱더 처절하게 감사실에 매달리고, 본인의 억울함을 소명했다. 결국 환수 대신 6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징계 중에 가장 끔찍한 징계가 감봉이라고 생각한다. 이 돈 받고 일하는 것도 싫었는데 감봉까지 한 월급 받을 생각 하면... 후)
여기까지는 좋은데, 감봉 처분을 받은 권팀장이 앞으로 더 폭주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