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인터뷰 (김슬기, 37세)
나와 내 사람들의 인터뷰, 아카이브북 만들기.
듣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그들의 이야기와 기록.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 내 친구 슬기 씨는 형제자매가 없는 나에게는 때때로 핏줄 같은 느낌의 벗이다. 물론 핏줄의 느낌을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어느 때는 핏줄보다 진한 정이라고 느껴지곤 하는 내 벗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함께했는데 그럼에도 슬기 씨에게는 지금까지 몰랐던 여러 얼굴들이 하나씩 보이곤 한다. 숨은그림찾기에서 답을 찾듯 행복을 찾아 맞추는 듯한 슬기 씨의 인터뷰, 그가 웃어서 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기 소개를 부탁해요
“성환 사는 삼십칠 세 김슬기입니다.”
요즘 근황은
“지호(아들)랑 벌레 찾으러 다녀. 또 벌레 찾고, 지호가 좋아할 만한 거 학습 체험 이런 거 많이 하러 다녀. 아 그리고 캠핑. 영훈이(남편)가 캠핑에 빠져서 캠핑장을 전전하고 있어.”
우리 가족 소개를
“우리 가족은 나 영훈이 지호, 세 가족. 영훈이는 그냥 영훈인데… 최영훈이고 나보다 세 살 어리고 회사를 그냥 대강대강 다니고 있고. 그렇고 우리 지호는 벌레랑 뱀이랑 양서류 파충류 이런 거 살아 있는 생물들을 엄청 좋아해.”
일상에서 지호는 어떤 아들이야?
“본드, 껌딱지 껌딱지. 나한테 너무 의존적이야. 다 엄마랑 하려고 하고 그렇지. 내가 너무 힘들어. 그런 앤 없지. 심각하지, 걔는 진짜 심각하지.”
왜 그런 것 같아?
“내가 너무 잘해줘서. 내가 너무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그런 것 같아. 내 잘못인 것 같아. 적당히 무시를 하고 그랬어야 되는데 너무 뭐라고 해야 되지, 그냥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 것 같아. 한마디라도 이렇게 무시당하면 기분이 안 좋을 것 같고 그래서, 어렸을 때는 말을 많이 해 줘야 한다고 해서 뭐 질문 하나 하고 이럴 때도 허투루 안 하고 되게 정성을 다해서 대답을 해줬더니 부작용이 생겼네.”
다시 키울 수 있다면
“발로 키울 거야. 다시 키우면 발로 키울 거야. 대답은 세 번에 한 번만 해 줄 거야. 다 해 주지 않을 거야. 그럴 거야, 적당히 키울 거야. 지금 내 인생의 중심은 지호야. 우리 가족의 중심은 지호라서 지호 위주로 돌아가. 다른 집보다 심하게. 우리는 평일에도 영훈이는 이미 5시 퇴근이니까 와 있으면 나 퇴근하고 엄마 집에서 지호 찾아서 집에 거의 아홉 시 반에 들어가. 그때까지 벌레를 찾든지 매일매일. 그래서 혓바늘이 안 나아. 나았다가 다시 돋았다가.”
안 하면
“안 하면 개진상부리지. 그리고 그냥 하나뿐이니까 해줘야겠다 싶어서 그냥 너무 좋아하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 내가. 매일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그런데 영훈이 야간일 때는 이제 규칙을 정해서 아빠가 없으면 개구리를 못 찾는다, 그래서 일찍 들어와. 여덟 시쯤 여덟 시 늦으면 한 여덟 시 반. 그냥 이제 얘가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니까.”
그러다가 몸이 안 좋으면 그 짜증은
“지호한테 표현되지. 좀 한 번 혼날 것도 두 번 세 번 혼나고 강도가 심해지겠지. 그러면 지호는 쫄지. 나를 무서워하거든. 날 또 무서워해. 요즘에는 그래서 ‘미안해요’ 이런 거를 배웠어. 일단 그래서 내가 조금 이렇게 화가 나면 ‘엄마 미안해요. 미안해, 미안해요. 엄마 실수예요’ 그래. 사과가 빨라졌어.”
지호는 귀엽고 똘똘한 슬기 씨의 아들, 영훈 씨는 슬기 씨의 남편이다. 슬기 씨도 나도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이어오며 알게 된 것은 부부로 인연을 맺은 둘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름을 조금씩 인정하고 타협해야 함을 인지하는 단계라면, 슬기 씨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 배우자를 통해 배우고 편안해지고 그래서 모든 것이 행복한, 정말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슬기 씨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주는 두 사람은 누구인지 더 깊이 이야기를 들어 본다.
우리 가족의 색깔은
“초록색 초록색. 맨날 밖으로 나가니까. 초록색,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초록색.”
남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 영훈이를 귀찮게 하는 사람. 영훈이가 있으면은 영훈이가 내 부탁을 다 들어주니까 많이 시켜 먹거든. 그래서 영훈이가 나랑 같이 월차를 안 쓸려고 그래. 내가 자꾸 시켜 먹어서. 퇴근 좀 시켜달라고 그러거든, 맨날. 그냥 모든 걸 다 ‘영훈아 이것 좀 해줘, 저것 좀 해줘’ 계속 그러거든. 영훈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 그래도 영훈이는 결혼해서 다 좋다고 그래. 다 행복하다고 그래. 나랑 싸우지만 않으면 나만 화를 안 내면. 근데 요즘에는 화 많이 안 내.”
부탁하는 사람이 왜 자꾸 화를
“아니, 말하기 전에 해 주면 좋잖아. 근데 이게 꾀부리는 게 눈에 보이니까. 기꺼이 해줘야지 귀찮아하면 안 되잖아. 찡그리면 웃으라 그래, 그냥 웃으면서 하라고 해. 영훈이 웬만하면 다 맞춰줘. 네가 보살이라 그랬잖아.”
그럼 지호한테 엄마는
“전부, 전부. 손과 발. 다 해 주니까 손과 발. 지호한테 너 엄마처럼 되고 싶어, 아빠처럼 되고 싶어? 하면 엄마라고. 내가 우상이지 우상. 왜냐하면 벌레 찾으러 다니고 하면은 채집을 거의 내가 해. 개구리도 내가 막 다 찾고 손으로 다 찾고 웬만한 거는 내가 해주니까. 영훈이도 못하는 게 아닌데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하니까 지호가 나를 더 높게 사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더 본보기가 돼야 돼, 지호한테. 근데 짜증을 너무 많이 내서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거지, 타고 난 거니까.”
지호한테 아빠는
“아빠는?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뭘까, 그건 물어봐야 될 것 같아. 그냥 엄마 다음인 것 같아. 꿩 대신 닭. 그 생각을 안 해봤네. 지호한테 아빠는 아빠지 뭐, 잘 놀아주는 아빠겠지. 만족하는데 엄마가 너무 넘사벽이라 묻혀. 아무리 잘해도 첫 번째는 나지.”
지호 크는 거 보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줘서 좋겠다. 지호를 보면
그냥 잘해줘야지, 행복하게 해줘야지, 이 생각했는데. 얘를 막 이렇게 공부를 시켜서 성공시키고 싶고 그런 건 아직까지는… 그냥 지금 당장 행복한 게 중요한 거니까.”
지호가 행복한 게 곧 나의 행복이야?
“응 그것도 내 행복이고, 병원 가서 미진 씨랑 수다 떠는 것도 내 행복이고. 그런 작은 거 내가 좋아하는 펜이랑 메모지 사는 게 내 행복. 그래서 나는 지금은, 지호 어렸을 때는 되게 불행하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행복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가장 힘들었던 순간? 지호 낳고 나서 초반에 그때부터 거의 두 돌까지. 그때 생각하면은 내가 이제 지호 뱃속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나는 소영이한테도 그랬잖아. 굳이 애를 낳아야 될까. 그런데 난 돌아가면, 미안한데 나는 안 낳을 것 같아. 내가 지금을 안다면 이렇게 힘들 거라는 걸 안다면 나는 안 낳을 것 같아. 지호가 100일 넘어서까지 한 시간 두 시간 잤나, 맨날 그랬었어. 나는 그리고 그게 대비를 안 해서 더 그런 것 같아. 나는 아기가 신생아는 당연히 하루에 12시간 잔다고 생각했어. 낮에 안 자고 안아줘야만 잤어. 밤에도 안 잤지 당연히. 계속 깨고 막 이래서, 그때 생각하면 너무 힘들다. 기억이 없어. 50일까지는 아예 없어. 근데 내가 원래 마음이 불안하면은 쉬지를 못하거든. 그래서 산후도우미가 2주가 넘잖아. 2주 동안 잠을 못 잤어, 낮에도. 내가 불안이 높다 그랬어, 그때 그 심리 상담 거기 갔을 때. 내가 불안이 되게 높은 편이랬어.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높을 것 같아. 잠은 자니까. 그래서 그런가 봐, 잠이 보약인가 봐. 근데 나는 지호 낳고 나서 효도한 것 같아.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살면서 30여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딴 거 돈으로는 효도 못 시켜드리고 지호로.”
요즘 취미는
“취미? 취미는 지호가 좋아할 만한 거 찾는 거. 그거 찾고 공부하는 거.”
제일 뿌듯할 때는
“언제 제일 뿌듯하냐고? 나는 낯을 너무 어렸을 때부터 많이 가려서 사람들 앞에 나서고 이런 걸 못 했거든. 근데 지호는 그런 거에 거리낌이 별로 없어서 거의 인사도 엘리베이터나 어디서 인사할 때 항상 크게 인사하고 자기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이런 거 보면 뿌듯해. 내성적인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좀 자기가 할 말은 할 줄 알고 그랬으면 좋겠어. 나는 어렸을 때 내성적인 내가 너무 싫었어.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효선이랑 고1 때인가 영화 보러 갔는데 내가 너무 부끄러움을 타서 티켓을 못 샀어, 그 정도였어. 티켓을 아예 못 샀어. 말이 안 나와서. 그리고 그런 경험이 전무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경험이 없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 뭐든지. 그래서 나는 그런 외향적인 사람들이 부러웠어. 그런 거 표현 잘하고 이러는 사람들 자기 기분이나 뭐 이런 거 이렇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그런데 영훈이가 그런 거 잘하거든. 남 눈치 안 보는 거. 그래서 나는 영훈이 처음에 봤을 때 그 모습이 너무 좋았어. 그게 어른스러워 보여서. 자기가 할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모습, 전혀 휘둘리지 않는 거. 그게 나는 어른스러운 것 같아서.”
슬기 씨를 보면서 인생은 얼마든지 새로운 색깔로 덧칠할 수 있고, 그림이 아닌 또 다른 장르로 변화할 수도 있는 거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너무나 명쾌하게 행복이라 말하는 슬기 씨가 부러운 순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벗어나 지금의 행복을 느끼기까지 슬기 씨가 겪었던 여러 감정들을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초록빛 가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겨울과 봄을 인내해야 했을까. 슬기 씨는 지금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서 그 인내의 결과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는 여유롭게 햇볕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다시 일을 시작한 지가
“1년 한 9개월 됐나. 내가 재작년 9월부터 했어. 그래 우리가 둘이 같이 저기 철학관 갔을 때가 재작년 7월인가 6월인가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일했잖아.”
어때?
“일은 재밌어. 일하는 건 좋아. 미진 씨랑 얘기하는 것도 좋고. 다 좋아. 일하는 건 좋아.”
결혼 전 직장을 결혼 후 4년 만에 간 소감은
“전이랑 달라. 일을 대충대충 해, 마음 편하게. 그리고 싫은 건 싫다고 다 얘기하고 그전에는 싫건 좋건 그냥 일했는데 지금은 얼굴에 다 표가 나지. 그전에 내색을 안 했다면 지금은 다 표현을 해. 남이 불편하건 말건 내가 불편하니까.”
미혼이던 동료도 이제 아기 엄마로 다시 만났는데
“그래서 미진 씨랑 할 말이 훨씬 많아졌어. 통하는 게 너무 많고, 알고 봤더니 mbti가 나랑 똑같더라고. 내 주변에 다 그런 사람들이야. 너랑 영훈이 빼고, 너네가 최측근들인데… 그래서 미진 씨랑 할 얘기가 훨씬 많고 그래서 미진 씨 덕분에 직장 다닐 맛이 나. 근데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다닐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 재밌어. 근데 그냥 그만두고 싶어. 그래도 그만두고 싶어.”
성격이 많이 변했지
“응 나도 변했어. 그래서 미진 씨도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래. 미진 씨가 나 되게 많이 변했다고 그래. 그전에는 되게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그랬으면 지금은 소심할지언정 안 그런 척하려고 하지. 그리고 지호 낳고 나서 그런 모습은 안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하고도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인사도 그냥 열심히 하고, 지호가 보니까. 체험 가더라도 다른 엄마들은 애벌레 징그럽다고 안 만지고 그러거든. 난 무조건 만지지.”
인생이 10화의 드라마라면 지금은 몇 화쯤일까
“3화. 그냥 이제 막 사는 게 재미있어서, 이제 재밌어. 아직 긴 것 같아 인생이. 3화 정도. 지금 등장인물 나오는 중이야. 등장인물 설명 중. 아직 다 성격이 드러나지 않았어.”
앞으로 기대하는 건
“지호를 빨리 키워서 영훈이랑 나랑 놀러 다니는 거. 내 꿈은 얼른 키워서 영훈이랑 나랑 캠핑 다니고 둘이 다니고 싶어. 근데 지호랑 노는 것도 재밌어. 힘든데 너무 힘들지만 지호가 좋아하면 그게 행복해. 앞으로가 무지 많이 남았어. 내가 지금까지 그전에는 한 게 너무 없어서, 그전 거는 좀 약간 무의미하지. 지금이 훨씬 재밌어. 영훈이 만나고 나서 재밌어. 지금이 딱 좀 약간 안정된 것 같아. 편안해.”
바람이 있다면
“뭐 살을 빼고 싶고 이런 거(문구) 더 사고 싶어. 끊임없이 사고 싶어. 이게 가끔씩 내가 이런 거 사는 게 월초가 되면은 텐바이텐에 들어가서 사고 싶은 거를 장바구니에 막 넣어 놔. 구경하고 그러다가 아 진짜 사고 싶다, 그러면 사. 근데 이게 얼마 안 되잖아. 근데 그냥 한 번에 사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진짜 진짜 사고 싶다 할 때. 그리고 미니멀라이프 하고 싶어서 낭비는 하지 말아야지 싶어서 좀 자제하다가 사.”
우리 같이 로텐(카페) 했었잖아. 내 인생에서 로텐은
“지워버리고 싶은 오점. 뭐에 씌었었나 봐. 그냥 나는 일을 하기 싫었어. 당시 같이 일하는 사람이 너무 싫어서 그냥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아. 나는 주기적으로 항상 그만두고 싶은 시기가 오거든, 그게 그때였어. 근데 지금은 핑계가 없어서 못 그만둬. 내 시간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어. 근데 그만두면 그때는 돈이 없어서 내 생활을 못 하겠지. 그냥 다니려고. 지호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그래서 로텐은?
“로텐은 지우고 싶다고, 생각도 안 해. 그거는 그때 거는 아예 생각도 안 해. 원장님이 로텐 컵 들고 있거든. 나중에 깨버릴 거라고 했어, 내가. 내가 갖다 버린다고 그랬어. 깨버리고 싶다,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얘기도 꺼내지 마. 나 서울 가서 개고생한 거 생각하면. 뭐 근데 그래가지고 영훈이도 만나고 병원도 다시 다닌 건데. 이게 내가 인생을 한 길로만 와봐서 그 다음 갈래가 만약에 내가 서울 안 가고 로텐도 안 했으면 누구를 만났을지 알 수가 없는 거잖아. 아니 근데 지금 행복하니까 억울하지는 않아.”
아주 만족스러운 삶인데
“그럼. 이제 지호가 원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실 지금도 깨거든. 근데 조금씩 줄어들고 있어. 밖에 나가서 TV도 볼 수 있어, 지호 재우고. 왜냐하면 곤충 보고 와서 골아떨어지거든. 낮잠을 안 자고 막 10시, 10시 반에 자니까 골아떨어지거든. 벌써 TV도 돼. 마음껏 볼 수 있어. 그게최고야. 아 그리고 내가 예전에 내 삶에 더 불만족했던 게 내가 다른 사람이랑 자꾸 비교하려고 그랬었거든. 옛날에는 그냥 병원 미혼 때 다닐 때는 내가 임시 치아를 막 연습하고 이러면 미진 씨도 하거든. 근데 나를 따라잡을까 봐 그게 되게 불안했었거든. 내가 제일 잘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잘하는 거, 이거를 내가 막 되게 스트레스받아 했었거든. 지금은 잘하든지 말든지… 될 대로 돼라. 나는 항상 지금도 머릿속으로 계획을 하거든, 시간을 쓰더라도. 예를 들어서 약속 시간이 1시다, 그럼 뭐 몇 시까지 빨래 돌려놓고 뭐 하고 뭐 하고 이렇게 머릿속으로 생각하잖아. 영훈이는 무계획. 그냥 오늘 할 일 못 해? 그럼 내일 하면 되고. 나는 그거 안 되거든. 근데 나도 이제 요즘에는 그렇게 해. 에이 그냥 나중에 하지 뭐.”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해. 사이좋게 지내자. 나는 딴 거 없어. 영훈이랑 그냥 사이좋게 지금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난 걔한테 그렇게 막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면, 다 그렇지 뭐.”
너무나 기분 좋은 인터뷰였다. 언제부턴가 슬기 씨는 굉장히 용감해졌다. 그 용감함은 어떤 결단 같은 것이어서 가끔은 슬기 씨와 대화하다가 뒤로 주춤하게 될 때가 있었다. 약간 무소의 뿔처럼 직진하는 느낌의 타협 없는 단단함이 슬기 씨에게 생겼던 것이다. 본인이 말한 것처럼 소극적이고 착하고 목소리 작은 학창시절의 슬기 씨는 지금의 ‘우상’이 되면서 특유의 ‘고집’만 남기고 모든 허물을 다 벗어버렸다. 그 고집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었다. 남편을 만나고 가정을 이루면서 슬기 씨 안에 있었던 고집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비친 것이라고, 나는 나름대로 해석했다. 친구로서 그 모습이 굉장히 멋있고, 때로는 배우고 싶을 정도로 슬기 씨는 달라졌다.
사실 나는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 어느 정도 결말을 위한 복선은 모두 나왔고, 떡밥 회수를 위한 전개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인생에 대한 기대치나 바람은 있지만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느낌은 그랬다. 그런데 슬기 씨의 아직 ‘등장인물 소개 중’이라는 말을 듣고서 진심으로 그녀의 내일이 궁금해졌다. 이제 막 도움닫기를 시작한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멀리 높이 찬란하게 펼쳐질까. 그 행복의 물결을 인터뷰한 오늘처럼 가까이서 바라보고 진심으로 환호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고 연재를 기다려주는 슬기 씨에게, 그리고 의도치 않게 실명 공개가 된 지호와 영훈 씨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참, 미진 씨에게도)
그리고, 인터뷰에서 잠깐 나왔던 ‘로텐’은 26살인가 27살의 무모했던 과거의 우리 둘이 차렸던 카페 이름이다. 슬기 씨는 그 시절을 회상하기도 싫다 하지만 나는 나름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다. 살짝 서운하게도, 너무나 당시를 거부하는 슬기 씨를 배려하며 카페 이야기는 처음 의도와 달리 생략하려 한다. (로텐 이야기는, 다른 연재에서….)
유일하게 인터뷰 업로드를 기다려줬던 슬기 씨가 이 순간 이후 한뼘 더 행복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