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가출하는 아내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이해해주는 남자가 산다. 나는 버릇이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어서 남편과 크게 싸움을 하기만 하면 가출을 한다. 2017년 네 번, 2018년엔 두 번 가출했다. 가출이라 해봐야 하루를 넘기지 못하는, 한마디로 유치한 행동에 지나지 않지만 이 행위를 함으로써 나는 남편 속을 있는 대로 썩여왔다.
2017년 결혼 후 6개월 동안 신혼집은 집이 아니라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우리 부부의 첫 집은 지금 살고 있는 타운하우스가 아닌 아파트였다. 27층. 높디높은 곳에 위치한 집에 올라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아파트에 살지 않았기에 그런 주거 형태가 친숙하지 않은 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까지 가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평소에도 그랬으니 남편과 마음이 크게 틀어진 날에는 어렵게 집에 도착해서도 숨이 막혀 살 수가 없었다. 집도 싫고 남편도 싫었던 그때, 처음 접하는 다른 차원의 답답함은 나를 집 밖으로 내몰았다.
가출의 역사가 시작된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떤 이유로 우리가 싸웠는지, 누가 더 잘했고, 못했고 등등 잘잘못을 따지는 이야기는 모두 생략한다. 코끝이 알싸해지던 가을밤 우리 부부는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도무지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순간 '내가 그 잘난 사랑에 미쳐서 천안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누구 때문에 서울에서 잘 살던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출근에 필요한 짐을 챙겨 뛰쳐나왔다. 밤 11시쯤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는 단 두대 남아있었다. 지금 뛰어가지 않으면 남은 건 마지막 기차뿐이었다. 전력질주를 해 역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분한 마음에 당장 기차에 타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땐 겁도 났던 것 같다. 고민 끝에 결국 마지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남편은 기차 문이 닫히던 순간 플랫폼에 도착했다. 마치 영화처럼 내가 탄 기차가 남편을 스쳐 서울로 향했다. 그날 가출하는 아내가 탄생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기차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 화가 풀려버렸다. 웃음이 났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때 나는 남편이 예약해준 호텔에서 잠을 잤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찾아준 호텔에서 잠이 들었다. 여하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의 유치한 전쟁은 끝 날 줄 몰랐다. 한 겨울 추위를 서로에 대한 화로 녹였다. 분하고 때론 억울해서 그 겨울 추위도 잊은 채 세 번을 더 집에서 나왔다.
이런 나를 본 친구들의 걱정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정말 착한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련한 나는 그제야 상황을 돌아봤다. 남편은 내가 집을 나간 행위에 대해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결국 내편에서 모든 상황을 이해해주고 넘어갔다.
결혼 2년 차에도 우린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고, 서로를 서운하게 했다. 나는 어린애처럼 또 반년에 한번 꼴로 집을 나왔고, 남편은 그런 나를 용서했다. 착한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뒤늦게 쥐꼬리만큼 든 철 덕에 결혼 3년 차가 된 지금, 어쩌면 신혼이란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하는 시점이 된 2019년엔 가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가출하는 아내다. 아직도 철딱서니인 나는 남편과 다투면 또 겉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이 마침내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