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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Dec 13. 2021

무연고지에 집을 샀습니다

무한한 선택지와 유한한 선택

순천에 집을 산다고 하니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우리 잘되라고 노파심에서  말들이었는데,  얘기들을 바를 정자로 세어 봤을  압도적 일위는 굳이 집을 사야 하냐는 것이었다. 순천으로 이사 가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우리가 원래 이상한 애들인  아니까), 살아보기도 전에 무작정 집을 사는   위험하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보통  얘기에는 1 정도는 월세나 전세로 살아보고, 그러고 나서 마음을 굳혀도 늦지 않다는 주석이 달렸다. 우리 역시  생각을  해본  아니지만, 연고  오라기 없는 순천 매곡동에 집을  데에는 우리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난 인생에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진부하지만 난 이 말을 믿는다. 지금 우리는 집을 사고 인테리어를 할 시간적 여유와 금전적 여유가 있다. 우선 내 직장은 현재 과도기 비슷한 걸 겪는 중이다. 따라서 업무량 조절이 비교적 쉽다. 출산을 앞둔 아내 역시 일을 쉬고 있다. 우리 둘 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다. 마침 양가 부모님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고, 또 내가 나라님이 주시는 보금자리론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들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변수들이 아닐 수 없다. 단 하나만 어긋났더라도 집을 못 샀을 것이다.


만약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내 일이 조금 더 바빴거나, 아니면 아내가 직장을 다니는 상황이었다면 말이다. 9월부터 우리가 순천을 방문한 횟수는 자그마치 6번이다. 태어나서 제주도도 6번 안 가봤는데 순천 6번이면 정말 많이 간 거다. 사전답사 1회, 마음에 들었던 동네 재방문 1회, 부동산에 계약하러 1회, 부모님이랑 같이 1회, 인테리어 업체 미팅 1회, 잔금 치르러 1회. (KTX에만 100만원 넘게 썼다) 돌이켜보면 발품을 판 만큼 정보가 모였고, 정보가 모인 만큼 진도가 나갔다. 만약 우리 둘 중 하나라도 시간을 못 냈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금전적 여유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일단 돈이 있어야 집이고 나발이고 하니까 말이다. 집 살 계획을 밝히자 양쪽 부모님께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돈을 보태주셨다. 나중에 죽을 때 돼서 물려줄 바에야 살아있을 때 주겠다는 심산이었다. 순식간에 집 살 돈이 마련됐다. 하지만 인테리어가 남았다. 우리가 산 주택은 매곡동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낸 무려 38살짜리 터줏대감급 집이다. 아내와 동갑내기이다. 긴 세월만큼 손볼 데가 많았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살 생각으로 산 집이기에, 인테리어도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었다. 결론은 돈이 더 필요했다. 마침 운 좋게도 지난 11개월 동안 나라는 초라한 인재를 등용해준 직장이 있어 소득증빙이 가능했기에 보금자리론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필요한 돈이 다 모였다. 만약 이 중 하나라도 무산되었더라면 예산부족으로 인해 계획을 엎었을 수도 있다. 정말 지독한 운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환승할 때마다 지하철이 기다리고 있고, 지하철 출구로 나가자마자 따릉이가 있고, 목적지 바로 앞에 따릉이 정류장이 있고, 따릉이를 반납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행운의 만 배 정도 되는 행운이 따랐다고 본다. 1년 뒤에 또 이런 운이 따른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가 집을 꼭 사야 했던 물리적 이유라면,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1년이란 시간이다. 1년 정도는 월세나 전세로 살아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바로 그 1년 말이다. 1년이면 강산은 안 바뀌겠지만,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다. 내 경우 지난 1년 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고, 소수의 사람들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꽤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고, 머리도 꽤 많이 길렀다. 가장 중요한 건 그사이 아빠가 됐다. 단 52주 만에 1년 전의 나는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1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우리가 단독주택을 산 이유는,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과 함께 늙어가기” 위해서다. 손때가 묻고, 냄새가 깃든, 우리가 집을 닮고 집이 우리를 닮아가는, 류시화 시집에서 나올법한 그런 관계를 꿈꾼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오래된 연인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고받은 세월이 긴 만큼 어우러지고 포개지는 관계. 1년이라도 일찍 집이라는 연인과 만나고 싶다. 집을 알아가고, 집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친 우리를 알아가고 싶다. 인테리어 업체의 거듭된 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친환경 자재를 고집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집은 1-2년 만나고 헤어질 연인이 아니다. 함께 늙어갈 삶의 동반자이다. 그러니 겉만 번지르르하고 이쁘장한 건 소용없다. 완벽하지 않고, 삐뚤빼뚤해도 좋다. 아니, 꼭 삐뚤빼뚤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가치관이 맞고, 결이 맞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플라스틱, 아크릴, 우레탄, 강마루, 래핑을 극구 반대하는 이유다. 물고 뜯고 만지고 교감할 상대가 이런 죽은 것들로 이루어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나무, 도기, 황동, 무쇠, 친환경 페인트를 고집한다.


올리버 버크만은 신작 <Four Thousand Weeks>에서 무한한 선택지 중 유한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버크만의 말을 듣고 우리가 내린 결정에 대해 생각해봤다. 순천으로 이사 간다는 것과 그곳에 집을 산다는 건 수많은 포기를 내포한다. 서울이 주는 문화적 혜택의 포기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의 포기. 주거지를 ‘남의 집’처럼 다루는 편리함의 포기와 한 장소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물리적 자유로움의 포기. 하지만 이 많은 포기는 우리가 순천에서 얻게 될 것들에 비하면 그저 왜소해 보일 뿐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산과 바다. 며칠 간격으로 열리는 재래시장. 온 식구가 함께 요리할 수 있는 넓은 주방. 가족과 친구가 머물다 갈 수 있는 손님방. 우리의 생활양식에 맞게 만지고 고칠 수 있는 집. 이곳에서 새로 만들 추억과 집이라는 매개를 통해 새로 닿을 인연들. 무한한 선택지 중에서 무연고지 주택 구매라는 유한한 선택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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