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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Dec 28. 2021

새집처럼 해주지 마세요

화폐로써의 집말고 가치표현으로써의 집

며칠 전 매곡동 친구가 김장김치를 나눠준다고 시간 날 때 한번 들리라 했다. 매곡동 친구라 하면 처음 순천에 왔을 때 묵었던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이다. 그는 대략 내 엄마 나이대로 추정되는 여성으로, 고향은 전주이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몇 년 전 순천으로 이사와 전셋집을 전전하다 결국 매곡동에 있는 폐가 두 채를 샀다. 두 채 중 한 채는 고쳐 부부가 살고, 맞은편 한 채 중 안채는 헐어 그 자리에 큰 정원을 만들었고, 사랑채는 고쳐 에어비앤비를 줬다. 이 집을 보자마자 잴 것도 없이 바로 열흘 치를 예약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지금, 집주인과 투숙객이었던 우리는 동네 이웃이 되었다.


요즘 집 공사 때문에 건축 자재를 고를 일이 많은데, 몇 달 동안 이것저것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든 것 사이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 마룻바닥을 예로 들어 보자. 이사 오기 전 서울에서 살던 빌라에는 강마루가 깔려 있었는데, 사실 그때는 내가 밟는 바닥이 어떤 바닥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대충 갈색 계열의 나무 무늬이니 나무이겠거니 하고 살았지, 이게 원목인지 강마루인지 따위에는 관심도, 아니 이런 단어들을 아예 몰랐으니 그냥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세상 밖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목은 문자 그대로 가공 전 상태의 나무를 뜻하고, 강마루와 강화마루는 목재를 여러 겹 쌓아 맨 위층에 나무 무늬 필름을 붙여 마감한 바닥재이다. 후자의 경우 접착제를 사용하여 가공하기 때문에 유해물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와 빌라는 대부분 강마루나 강화마루를 쓰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원목은 비싸다. 한국의 목재 자급률은 10%를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수입 목재에 의존하기 때문에 보통 원목이 강마루보다 두 배 정도 비싸다. 둘째, 원목은 기후에 따라 수축과 팽창이 일어나 뒤틀림이나 들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바꿔 말해 시간이 지나면 바닥 군데군데가 올록볼록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재밌는 건 아내가 살던 영국이나 캐나다에선 사람들이 이를 ‘흠’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국이나 캐나다에선 집을 짓거나 수리할 때 천연자재를 최고로 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기는 변형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인테리어 업체 과장님이 우리 같은 고객은 처음 본다며 했던 말이 있다. 대부분 “새집처럼 해주세요”라고 주문하지, 우리처럼 수납장 손잡이부터 페인트 브랜드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 고민하고 관여하는 고객은 드물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새집’ 같은 집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뚜렷한 취향이 없거나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전문가에게 믿고 맡기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새집’은 그 자체로써 굉장히 명확한 미적 기준이다. 노출 콘크리트, 빈티지 가구, 천장에서 주렁주렁 늘어진 보헤미안 느낌의 식물 인테리어는 전부 ‘새집’과는 거리가 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통일된 미적 기준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유현준 홍대 건축과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아파트 덕에 근대화를 이뤘으나, 그 과정에서 가치관의 정량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아파트라는 표준화된 주거공간은 고밀도 사회를 가능케 했고, 이는 상업과 시민의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모두가 아파트라는 엇비슷한 주거공간에 살면서 집은 가치표현의 기능보다 화폐의 기능을 띠기 시작했다. 집의 역사나 집주인의 개성 같은 정성적 잣대는 설 곳을 잃었고, 집값이라는 정량적 지표만이 집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단위로 남았다.


사람들이 ‘새집’을 원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삼 년 살다 되팔 수 있는 환금성으로 집을 보는 이에게 집은 결국 투자수단이다. 그러니 집에 내 개성을 반영할 필요도, 아니 내 개성이 뭔지 들여다보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다. 가장 상품성 있는 집, 즉 가장 ‘새집’스러운 집을 사서 최대한 ‘새집’처럼 살다 털고 나오면 그만이다. 따라서 올록볼록해진 원목마루는 집의 세월과 역사를 담은 자랑거리가 아닌, 그저 집의 상품성을 떨어트리는, 헌집 티나 내는 ‘흠’에 불과한 것이다.


지난번 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내와 내가 원하는 집은 ‘새집같은 집이 아니다. 올록볼록해진다 해도 강마루보다 원목이 좋고, 손때가 묻는다 해도 벽지보다 페인트가 좋다. 돌이켜보면 매곡동 에어비앤비에 끌렸던 것도 바로 ‘새집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가 거칠고, 비대칭이고, 번지르르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사람 눈이 신기한 ,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무의식적으로 식별한다. 인테리어의 ‘자도 모르는 나지만 멀리서도 원목과 필름의 차이를, 벽지와 도장의 차이를 알아볼  있었다. 미세한 질감의 차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균일한 면과 자연스럽게 이색진 면의 차이를 눈이 먼저 포착해낸다. 인위적인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몸이 동물적으로 반응하며, 약간의 불쾌한 끝맛을 남긴다. 마치 인간과 너무 닮은 로봇을 봤을  느끼는 불쾌감처럼 말이다. 에어비앤비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정원을 둘러보자 마음속으로 느꼈던 편안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집에서 분양받아온 식물들로 아기자기 이루어진 화단하며, 철거하고 남은 돌덩이와 기왓장으로  울타리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집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이곳은 우리가 꿈꾸는 집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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