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기술사의 등장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쓴 편성준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 무려 두 자리 수에 달하는 이 역이름을 지으며 누군가는 ‘역사’를 빼자고, 또 누군가는 ‘문화’를 빼자고, 또 누군가는 굳이 ‘공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하냐고 한마디씩 했을 테다. 하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세 단어 모두 반영이 되었고, 거기다 ‘동대문’까지 붙어야 하니 결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라는 한 호흡에 내뱉기 버거운 이름이 탄생했다. ‘처음부터 이토록 장황한 역이름을 원했던 사람은 없었을텐데…’라는 생각이 편성준의 머리를 스쳤고, 역시 인간의 의도 따위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 게 세상사인가보다 하는 깨달음과 함께 다음 역에서 내렸다고 한다.
집 공사를 지켜보는 우리도 비슷한 마음이다. 12월 말에 철거를 마치고 2월 중순까지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오만방자한 계획은 철거 시작 후 이틀도 안 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골조만 남긴 집은 우리가 예상했던 구조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H빔의 위치라던가, 내력벽의 상태 등을 봤을 때, 지금 상태로는 우리가 설계한 바를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역력했다. 며칠간 집을 보강해서 살리네 마네, 차라리 새로 짓는 게 낫네 안 낫네 하는 얘기들이 오갔다.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여차하면 우리가 꿈꾸던 집이 물 건너갈 뿐만 아니라 경제적 파탄에 이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며칠을 고뇌한 끝에 아내와 난 새로 지을 때 짓더라도 보강이 가능한지는 확실히 알고 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의 연락을 받은 인테리어 업체는 곧바로 구조기술사 물색에 들어갔다. 구조기술사(줄여서 구조사)는 집의 기반을 검토하여 건축물이 구조적으로 안전한지를 판단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사는 순천이라는 곳은 서울 같은 대도시와는 다른 점이 많은데, 흑두루미와 짱뚱어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는 것 말고도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훨씬 적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이다. 몇 달 전 집 계약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업체를 알아보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네이버와 구글을 아무리 뒤져도 건축면허를 가진 번듯한 업체는 순천에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업체 저 업체 재볼 것도 없이 유일무이한 이곳에 우리 집을 맡겼다. 이런 현지물정을 고려했을 때 과연 실력 있는 구조기술사가 나타날지는 의문이었다.
얼마 뒤 인테리어 업체로부터 구조사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깊은 산속에 은둔 중인 재야의 고수는 아니었고, 그들과 협력업체 관계인 분이라고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어느 화창한 월요일 오후 드디어 그를 집에서 만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현장 작업복 차림의 그는 중후하면서도 소박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집 곳곳을 멀찍이 훑어보며 우리에게 어디는 손봐도 되고, 어디는 만지면 안 되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여기를 헐고 싶으면 이렇게 둘러서 골포스트 형태로 H빔을 박으시면 돼요.”
“이 벽은 만지면 안 돼요. 여기를 만지려면 저쪽을 보강해야 하는데, 저쪽은 지금 문이 뚫려 있어 하중을 못 받아요.”
“여기는 한 30cm 정도는 더 갈아도 되는데, 그 이상은 빔을 대야 해요.”
우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홀린 듯 귀 기울였다. 그는 내가 예상한 구조사의 행동거지와는 사뭇 달랐다. 골프선수들이 골프채를 길게 뻗어 그린을 읽듯, 그 역시 수시로 허리춤에 달린 줄자를 꺼내 이것저것 재보기도 하고, 뭔가 더 극적으로 집을 살펴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슬렁슬렁 눈으로만 훑어보며 보이는 족족 뚝딱뚝딱 처방을 내렸다. 집 검토를 마친 그는 우리에게 “헐기엔 아까운 집이니 보강하면 10년은 거뜬히 산다”는 한줄평을 선사했다.
집을 헐기 전까지 구조기술사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직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누군가 이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다. 집을 나서면서 그는 우리에게 사람 제대로 찾았다고 했다. 이 분야에선 자기가 대가라고. 내가 볼 때 자기 자신을 ‘대가’라고 부르는 자신만만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이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자신만만함이 한 부류이고, 또 하나는 한 분야에서 진드근히 갈고 닦아 정점을 찍은 사람들이 내비치는 자신만만함이다. 전자는 말이 많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만, 후자는 애쓰지 않아도 그 무게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배우 최민식이 “저 연기 잘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자랑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우리 집을 보고 간 구조사의 장난 섞인 자기 자랑도 내 귀엔 비슷하게 들렸다.
구조기술사가 보강 설계도를 그려주면,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업체를 찾는 것이 다음 순서다. 구조기술사도, 구조보강업체도, 원래 계획에는 없던 변수들이지만 그러려니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탄생을 조금 더 동정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군들 간결하고 깔끔한 게 싫어서 안 했을까. 나 역시 ‘철거인테리어끝’을 원했지만 결국 ‘철거구조기술사구조보강업체인테리어끝’이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단어들이 비집고 들어와 들러붙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아내와 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한다. 집을 새로 지으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들지 가늠할 수 없다. 돈 마련하고, 도면 다시 그리고, 인허가 받고 하다 보면 올해는커녕 내년도 빠듯하다. 공사기간은 약 두 달가량 늘어났지만, 그래도 우리가 꿈꾸는 주택살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에 다시 희망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