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마아빠 Jan 01. 2022

매일 아침 미지근한 커피를 마십니다

커피에 비친 나라는 인간의 한계

가끔 나라는 인간의 지능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매일 아침, 그것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되풀이되는데, 바로 커피를 내릴 때이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미세하게 불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다. 처음에는 이 불쾌함의 원인이 불분명해 보인다. 아픈 데도 없고, 머리숱도 여전하고, 밤새 아내가 날 떠나가지도 않았다. 도무지 이 미세하게 찝찝하고 찌뿌둥한 기분을 이해할 수 없다. 부엌으로 나오면 그제서야 짚이는 데가 있다. 아직 커피를 안 마셨구나.


매일 아침, 어제와 똑같은 동선을 그리며, 숙련된 기계처럼 커피를 내린다. 머그잔에 드리퍼를 올리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끼운다. 뜨거운 물로 여과지를 한번 적셔주면 여과지의 종이맛을 씻어내릴 뿐만 아니라,  물이 흘러 머그잔을 예열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낳는다. 쫄쫄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물멍을 때린다. 혹자는 묻는다.  굳이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내리냐고.  이유는 바로 자급자족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나같이 뼛속까지 현대문명에 물든 사람이 제대로  자급자족을 경험할 기회는 흔치 않다. 원두라도 직접 갈면서(이것도 전기의 힘으로 갈지만) 자급자족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마음이다. 만약 사계절 농사일의 육체적 고됨을 만분의 일로 줄이고 오분짜리 체험으로 압축시킨다면, 드립커피를 내리는 묘미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고 자위해본다.


머그잔에 고인 물은 싱크대에 버리고, 다시 드리퍼를 컵 위에 올린다. 갈아놓은 원두를 드리퍼 안에 붓고, 눈대중으로 원두의 수평을 맞춘다. 이제 커피라는 제사를 지낼 준비가 다 되었다. 제사도구로는 스뎅 드립주전자가 적격이다. 이 드립주전자는 단 하나의 용도만을 가진 물건치고는 굉장히 활용도가 높다. 매일 딱 한 번, 딱 한 가지의 역할만을 완벽히 수행한 후 유유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치 일본 시골 동네 어딘가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 우동집을 운영하는 주인처럼. 내가 이 드립주전자 만큼만이라도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일 수 있을까 하는 명상에 잠기려던 찰나 카페인이 부족한 뇌는 커피나 마저 내리라고 재촉한다.


드리퍼 안에 소복이 쌓인 원두를 드립주전자로 살짝 적신다. 뜸들이기 위해서다. 이때 관건은 흥건히가 아닌 원두에 최소한의 수분기만 불어넣는다는 생각으로 해야 한다고 어떤 유튜버가 그랬다. 가끔 귀찮아서 건너뛴 적도 있는데 맛 차이는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웬만하면 이 절차를 준수하려 한다. 맛도 맛이지만 이 의식 자체가 숭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 기다리면 물을 머금은 원두가 봉긋이 솟아오른다. 이제 본격적인 드립질이 시작될 차례다.


백 명의 사람에겐 백 가지의 취향이 있다는 상투어는 드립커피를 내릴 때도 유효하다. 그렇다고 그 백 가지 방식이 다 똑같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중에는 분명히 고수의 방식과 하수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내 방식이 하수의 방식에 속할 확률은 약 96.4%이다. 왜냐? 내가 지금까지 드립커피 공부에 투자한 시간은 1시간도 안 된다. 그럼에도 3.6%의 여지를 둔 것은 내가 내린 커피의 맛이 그럭저럭 괜찮기 때문이다. 난 먼저 바깥에서 안으로 회오리 모양을 그리며 원두 전체를 적신다. 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반대로 안에서 바깥으로 한 번 내린다. 조금 있다 나머지 물은 원두 중앙에 오백원짜리 동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동전 안에 마저 휘휘 부어주면 끝이다. 실제로 드립하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5분 정도면 250ml의 커피 한 잔이 다 내려진다. 제 역할을 마친 드리퍼는 싱크대에 고이 모셔놓고, 머그잔을 들고 식탁으로 향한다. 열심히 제사를 치렀으니 보상받을 일만 남았다.


글을 열며 내 지능이 의심된다고 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그렇다. 한 모금 홀짝하기 무섭게 신호가 온다. 장이 건네는 아침인사다. “안녕? 잘 잤니? 나도 잘 잤어. 너가 아침이면 커피를 내리듯, 나도 내 할일이 있단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커피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려무나.” 이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진짜 나빴다. 야속하고 이기적인 놈. 아니, 커피 내리기 전에 언질을 주면 어디 덧나나? 왜 굳이 커피를 다 내리고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알려주는 건데? 장은 사디스트가 틀림없다. 마치 전지적 장의 시점에서 날 내려다보며 킥킥대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장 탓할 것도 없는 게, 이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장은 늘 같은 시간에 신호를 보내왔다. 어제도, 그제도, 3달 전에도, 1년 전에도 그랬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늘 예고해주는 장은,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협조적이다. 결국 문제는 나다. 아침이면 커피가 너무 절박한 나머지 매일 아침 자발적 기억상실을 택한 내 잘못이다.  


심정지 골든타임 4분이 있듯이 커피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이 골든타임 안에서만 적정온도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입술에 닿았을 때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뜨뜻미지근하지도 않은 온도. 몽롱한 영혼을 깨우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기에 딱 적당한 온도. 이 온도를 놓치면 커피는 천상의 물에서 그냥 쓴 물이 된다. 내가 비몽사몽으로 기울인 정성과 수고를 생각하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커피를 붙잡고 있자니 장이 격하게 저항한다. 잠깐 고뇌한다. 왜 난 매일같이 이렇게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할까. 결국 궁여지책으로 접시로 머그잔을 덮고 화장실로 냅다 달린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마 내일 아침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탈서울 D-26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