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마아빠 Jun 12. 2021

탈서울 D-265

KTX 타고 포항, 부산, 여수는 가봤지만, 동해안은 처음이었다. 생경한 풍경을 눈에 담을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기차 청량리역을 지나 30 즈음  가더니, 촘촘한 아파트 단지는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주택가로 변했고, 8차선 도로는 광활한 논으로 변했다. 원주를 기점으로 기차는  먹듯이 터널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누가 전등 스위치로 장난이라도 치듯 객실 안이 어두웠다 밝기를 반복했다. 조금 지나자 터널 드나들기가 뜸해지더니 이내  트인 푸른 시야가 창문을 가득 메웠다.  멀리 동해바다가 보였다.


기차에서 내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릉 하늘의 푸르름은 비범했다. 물론 서울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는 있다. 비가 개고 나서라던지 미세먼지가 ‘좋음’일 때는 서울 하늘도 남부럽잖게 푸르다. 근데 기분 탓인지 플라시보 효과인지 강릉 하늘은 마치 처음으로 도수 안경을 꼈을 때 흐릿한 시야가 뚜렷해지는 그런 푸르름이었다. “아... 이런 하늘 아래서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은 아내와 경포해변 일대를 거닐었다. 경포해변은 여행객 상권이 밀집해있어 서울 도심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릉으로 이사를 오더라도 여기는 피해야지”라고 머릿속에 메모했다. 이튿날 아점으로 짬뽕순두부를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지역명물인 두부와 대중메뉴인 짬뽕을 억지스럽게 퓨전시킨 상술일 거라는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몽글몽글한 순두부와 얼큰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아내와 강릉을 뜨기 전에 꼭 한번 더 오기로 합의를 봤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남대천을 따라 걸었다.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강릉엔 남대천이 있다. 다음 행선지는 강릉중앙시립도서관. 여행 와서 웬 도서관이냐 할 수도 있는데, 아내와 나에겐 각자 탈서울 must-have 리스트가 있다. 서울을 벗어나더라도 이것만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들을 모아 놓은 리스트이다. 아내보다 문명의존도가 높은 나는 헬스장, 도서관, KTX 접근성 등을 이 리스트에 넣었다. 이 중에서도 도서관이 매우 중요하다. 명상을 몇 년째 해왔지만 지루함을 지루함 자체로 바라보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내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줄 놀잇감이 필요하다. 내 최애 놀잇감은 책이다. 물론 넷플릭스도 놀잇감으로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넷플릭스를 정주행하고 나면 늘 뒷맛이 쓰다. 더군다나 시리즈를 시작하면 식음을 전폐하더라도 끝장을 봐야 하는 스타일이라,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또 끝장을 보더라도 남는 건 허무함과 공허함 뿐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넷플릭스를 놀잇감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책은 종일 빠져있어도 뒷맛이 쓰지 않다. 오히려 종일 육체적 노동을 했을 때 준하는 개운한 성취감을 준다. 아무리 시시껄렁한 자서전적 에세이라도 그렇다. 책은 정말이지 기특한 놀잇감이다. 그래서 도서관은 내 생활반경 안에 꼭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방문한 강릉중앙시립도서관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공간도 널찍널찍하고, 장서량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전체적으로 쾌적했다. 화룡점정은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는 사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는데 바다가 보이면 동남아에서 휴양하고 있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기본적으로 서울 소재의 도서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책도 책이지만, 복도, 자료실, 열람실에 사람이 움직일 공간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서울이었다면 책장이나 책상으로 빼곡히 차 있었을 공간들이 잉여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게 여유구나 싶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용적률이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붐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만약 서울이었다면 이런 한적함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언제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지금 이 여유를 마냥 마음 편히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살이가 직업이라면 이것도 직업병이라 볼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강릉중앙시립도서관은 합격이다. 찾아보니 이 동네 이름이 포남동이란다. 포남동... 기억해주겠어. 내 마음은 이미 강릉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떤 억만장자의 조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