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결혼식 탐방기 - 5
결혼식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던 하객들은 다시 피로연 저녁 만찬을 위해 헛간에 모였다.
헛간 안은 10m는 족히 돼 보이는 뻥뚤린 층고에, 서까래와 대들보가 그대로 노출된 천장, 그리고 양쪽 지붕의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 공간에선 뭘 해도 멋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백 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담소 나누는 소리가 헛간 안 공기를 꽉 채웠다.
저쪽에서 아내 친구들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테이블로 가니 꽃다발과 꼬마전구, 그리고 수제작된 푯말들이 어우러져 킨포크 잡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아기자기한 소품들 사이로 엄지손가락 만한 나무통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중간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자리마다 놓여 있는 걸로 봐서 이름표의 기능을 하는 건 분명한데, 도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지, 그리고 굳이 이쑤시개통처럼 제작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도무지 감을 못 잡는 내게 옆자리에 앉은 밀라가 킥킥대며 말했다.
"좀 있다가 알려줄게."
피로연은 신랑 대니가 린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썰을 푸는 것으로 시작됐다.
데이팅앱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던 두 사람.
이번에도 안 되면 안 되는 거다,하는 심정으로 나간 자리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어느덧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젠 두 살 배기 딸 코라의 부모가 된 린다와 대니.
코로나 때문에 미루고 미뤄온 결혼식을 오늘에서야 올리게 된 우여곡절의 스토리.
저녁 만찬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스시집에서 볼 법한 커다란 나무밥솥 같은 통이 옆 테이블에서 건너왔다.
"자 일수, 이게 뭐냐면..."
아까 뜸을 들였던 밀라가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이 나무밥솥의 정식명칭은 'cog'로서,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오크니 섬에서 자주 출현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린다 쪽 가족이 오크니 출신인데, 오크니에선 이 cog에다가 폭탄주를 잔뜩 말아 테이블마다 돌려가며 한 사발씩 마시는 게 결혼식 전통이라고 했다.
들어가는 재료로는 위스키, 브랜디, 럼, 진, 그리고 집에서 만든 수제 에일과 마지막으로 달달함을 주기 위해 설탕을 넣는다고 했다.
원래는 바이킹의 후손답게(오크니 인구의 30%가 바이킹 핏줄이라고 한다) 입에다 대고 벌컥벌컥 마시는 게 정석이겠으나, 코로나 시국인만큼 위생관리 차원에서 각자 자리에 놓인 술잔에 따라 마시라는 안내를 받았다.
따라서 자리마다 놓인 이 조그마한 나무통은 바로 샷글라스였던 것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웨이터들이 대거 등장하여 본격적으로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객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피로연장을 '케일리화'하는데 동참하기 시작했다.
의자와 테이블은 한쪽 구석으로 밀고, 다 먹은 와인병과 맥주캔은 비닐봉지에 담아 밖에 내놓고, 담배 필 사람은 담배 피우고, 화장실 갈 사람은 화장실에 갔다.
동아리 MT도 아닌 결혼식에서 하객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리정돈을 돕는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결혼식에서 주와 객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힘을 모아 하나의 축제를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신기했다.
이내 조명이 꺼지고 은은한 무드등이 켜졌다.
세팅을 마친 밴드 리더가 마이크를 툭툭 치더니, 케일리의 시간이 왔음을 알렸다.
(6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