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생각 Dec 12. 2022

솔직히 놀려고 결혼하는 거죠?

영국 결혼식 탐방기 - 6

이전글


엄밀히 말하면 '케일리'의 게일어 어원은 '사교모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젠 '여럿이 모여 민속음악에 맞춰 춤추는 파티'를 일컫는 단어로 통용된다.

아내 친구들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영국에선 체육시간에 케일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특히 케일리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로 가면 조기축구 동호회처럼 케일리 동호회도 많다고 한다.


케일리에 관해 좀 더 알아보고자 구글신을 호출했다.

잠시만, 근데 케일리를 어떻게 쓰지...?

Kayley. 땡.

Kaylee. 땡.

Chaley. 땡.

Cayli. 땡.

결국 아내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된 케일리의 스펠링은 'ceilidh'였다.

생각지도 못한 알파벳 조합이었다.

저렇게 쓰면 '체일리드' 아닌가?

하도 기가 차서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읽어보니, 게일어와 영어는 사실상 아예 다른 어족이라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둘 다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긴 하나 게일어는 켈트어에서 파생된 언어이고, 영어는 게르만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것이었다.

게일어와 영어 사이엔 무려 40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했다.



"자 그럼 첫 곡은 The Gay Gordons로 가겠습니다."

바이올린을 턱에 괸 밴드 보컬이 말했다.

경쾌하다 못해 촐싹 맞은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됐다.

띠리디리디리디리디리.


보컬의 디렉션에 귀 기울여 가며 내 생애 첫 케일리 스텝을 밟았다.

모든 사람들이 강강술래 하듯 큰 원을 지어 시작한 춤은 어느덧 둘씩 짝을 지어 마주 보고 추는 춤으로, 그다음엔 셋으로 나뉘어 다 같이 팔짱을 끼고 빙빙 도는 춤으로, 마지막엔 삼인조끼리 마주 보고 여섯이서 추는 춤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리고 한 곡을 한 번만 추고 마는 게 아니라 10번 넘게 반복해서 추는데, 재밌는 건 회차가 늘어날수록 곡의 템포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빨라지는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을 수 있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얼마나 '잘 노느냐'이다.

곡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혈중알콜농도가 올라갈수록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이 속출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흥을 내고 더 격해진다.

따라서 케일리의 본질은, 한국인 주제에 감히 그것을 논한다면, 춤동작을 잘 따라하는 것보다, 춤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속에서, 서로 술에 취해 뒤엉켜 노는 걸 누가누가 더 잘하느냐가 케잘알의 진정한 덕목일 것이다.



네 곡을 내리 추고 나니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한 곡이라도 더 췄다간 집에 기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고민 끝에 귀가를 결심했다.

케일리를 추다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긴 후, 줄스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헛간을 나섰다.


마지막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에 새삼 밴드가 너무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알못인 내가 이 정도로 즐길 수 있었던 건 다 밴드 보컬 덕분이었다.

사회자가 재밌어야 돌잔치가 재밌는 것처럼, 케일리 밴드 역시 연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음악은 기본이고, 관객과 적당히 소통도 해주고, 분위기에 맞게 선곡을 하며(파트너곡 vs 단체곡), 나 같은 케알못과 케잘알이 잘 어우러질 수 있게 중간중간 디렉션을 줄 수 있는 팀이 좋은 케일리 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날 린다한테 이 얘길 했더니, 안 그래도 결혼식 준비하면서 가장 처음 한 일이 바로 밴드를 예약한 거라고 했다.

특히 이름 있는 케일리 밴드는 금방금방 예약이 차 예식장만큼이나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린다 커플과 찐하게 작별인사를 한 뒤 차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2박3일 떠올렸다.

이상하게 결혼식보다는 동아리MT나 페스티벌에 다녀왔을 때의 여운이 맴돌았다.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하면서도 놀 건 다 논, 건전한 뿌듯함 같은 게 느껴졌다.


피로연 저녁 식사 때 밀라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영국 사람들은 결혼식에 가는 걸 좋아한다는 말.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내 첫 영국 결혼식에서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시간적 여유라고 말하고 싶다.

수년만에 만난 친구 지인들과 2시간 만에 헤어지는 게 아닌, 2박3일에 걸쳐 여유를 갖고 함께하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숙소 거실 바닥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어와 둘에서 넷이 되고, 넷에서 여섯이 되고, 또 셋으로 줄었다가 다시 넷이 되고, 다양한 조합만큼 다양한 얘기들이 오갔다.


아내와 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후회나 미련은 없다.

결혼식 대신 친구들을 한 팀 한 팀 집에 초대하여 밥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으나, 당시 코로나가 허락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앞으로도 결혼식을 올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린다와 대니처럼 며칠에 걸쳐, 씨 돈만 있으면 일주일에 걸쳐,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

다만 케일리 밴드를 영국에서 공수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케일리 대신 어떤 춤을 추면 좋을까?



-끝-

작가의 이전글 나무밥솥과 폭탄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