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옛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ly Dec 01. 2015

벽돌집

빨간 돌빵집에 아이들이 살았데요

왕십리에서 태어나 잔뼈가 굵은 내가 서울 시내에 있는 광희국민학교(光熙國民學校)에 들어가 일 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이사 간 곳은 물 찬 논에서 개구리가 우렁차게 노래부를 때, 논 바닥을 헤치며 물속에 흙 구름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들이 떼 지어 살던 동서울 변두리의 쌀나무 우거진 동네 자양동(紫陽洞)이었다. 그곳은 조선시대에 풀이 무성하여 파발마(擺撥馬)를 먹여 키우던 곳이었기 때문에 동회(洞會) 쪽은 여전히 옛 지명인 자마장(雌馬場), 옛날에 밤나무가 많았던 우리 집 쪽은 밤뎅이라고 불렀다.


내 추억 속의 밤뎅이는 동회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강 쪽으로 삼십 분은 족히 걸어가야 나오는 야산의 수재민촌이었는데, 국회의원을 잘못 뽑아서 그랬는지, 여름에 비가 좀 오거나 초봄에 언 땅이 녹으면, 고무장화가 진 땅에 쩍쩍 붙어서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거기에 땅을 사서 부로꼬로 집을 짓기 시작한 지 두어 달 후, 방바닥은 말랐지만 지붕에 기와가 올려지기 바로 전에 들어가 모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며 잠을 잤다. 그러니까 그때가 분명 집의 준공식(竣工式) 때는 아니었고 상량식(上樑式) 올릴 때쯤인 1967년 초가을이었다.


이사 후에 바로 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만 여섯 살 적부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안개 자욱한 논길을 걸어가, 버스 타고 먼 길을 통학해야만 했다. 아침에 버스정류장 가는 길이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몸에 책가방 메고 양쪽에 논이 있는 흙 길을 한참 걸어 철조망이 쳐져 있는 미군부대를 지나면, 비로소 건너편에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버스 차장은 그곳에서 검정다리 내리라고 소리를 쳤는데, 정작 거기에는 다리가 없었다. 내가 시내에서 천호동(千戶洞) 쪽으로 난 검은 아스팔트 길 아래 개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검정다리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도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전후(戰後) 베이비붐으로 귀 빠진 내 또래의 저 학년생들은 부족한 교실을 나누어 써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는 격주(隔週)로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실컷 자고, 점심때에 맞추어 논길에도 들어가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헤엄치는 것을 보면서 느긋하게 학교에 가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에 자양국민학교로 전학하고 나서야 동네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이 사는 집들은 구부러진 판자 위에 얼기설기 나무토막과 보로박구를 덧붙이고 타마구 입힌 방수 종이로 지붕을 덮어 씌운 하꼬방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보다 나은 시멘트 집도 난방과 세탁은 물론, 목욕탕에서 화장실까지 전 기능을 발휘하는 좁은 부엌이 딸린 단칸방 집이어서, 한여름에도 선풍기는커녕 구멍탄의 불씨로 이열치열(以熱治熱) 해야만 했다.


밤뎅이에서 강변으로 진흙 길을 따라 좀 더 내려가면, 야산 아래 큰 웅덩이 옆에 조선연와(朝鮮煉瓦)라는 벽돌공장 사람들을 위해 벽돌로 지은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반듯이 각진 일자(一字)를 그리며 길게 드러누운 그 벽돌집은 지붕도 납작하여 영락없이 긴 상자 곽 같았다.


그 벽돌집에 사는 아이들은 색 바랜 검은 목면 보자기를 넓게 펴서 교과서와 공책들을 각지게 잘 쌓고 긴 쪽으로 둘둘 말아 책보를 싸서 허리 뒤에 붙이고, 배 앞으로 보자기 끈을 동여 메고는 부엌에 놓인 검정 고무신을 신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산길을 따라가든가 혹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먼 길을 걸어서 등교했는데, 행여나 길을 가다가 우박이 떨어지는 듯 땅에 잔돌 튀는 소리가 들려오면, 등 뒤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도라꾸가 옆을 지나기가 무섭게 용감히 차 뒤에 매달려 다리품을 아꼈다. 그러다가, 백미러를 보고 아이들이 올라 탄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운전사가 급정거하여 운전석에서 내려오면 날쌘 녀석들은 잽싸게 내뺐는데, 동작이 둔한 녀석들은 도라꾸에 붙어 있다가 붙잡혀 무겁게 휘두른 아저씨의 손바닥에 볼때기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회개(悔改)의 눈물을 훔쳤다.


벽돌집 아이들은 교실에서도 여느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수업 끝나면 책보를 둘러메고 서로 모여 집으로 돌아가 공장에서 갓 잘라낸 벽돌을 니야까에 실어 나르며 품팔이를 하기도 했다. 일당(日當)이 아니라 실어 나른 벽돌의 수에 따라 수당(手當)을 받으며 할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하루 종일 일해서 라면도 못 끓여 먹는 저임금 노동에 매달렸던 그 아이들은 공중목욕탕에도 가 본 적 없이 어둡고 비좁은 벽돌집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살았다.


벽돌집도 야산도 다 불도저에 밀려 사라진 자리에서 쑥쑥 자라난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들도 어느새 낡아 재개발을 기다리며 서 있는 지금은 벽돌공장 아이들이 쫓겨 나갈 때 집 앞 웅덩이에서 피난 나온 개구리들만 강변(江邊)에 남아서 가끔씩 슬픈 옛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 2012년 6월 1일,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머틀비치에서 대서양의 거센 파도가 하얀 물거품을 밀어 오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유월 정오의 뜨거운 햇살에 그을려,

잿빛으로 타 들어간 마른 아스팔트 길가로,

하늘 향해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만 늘어선 곳에,

낮은 벽돌집 하나 볼 수 없으니,... _-_-_--_-_+_=_+_*_

무(無)를 화두(話頭)로 하여 본 도원경(桃源境)에 벽돌공장이 섰다.

그러니 경전(經典)에 이른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알듯 말듯한 말들을 풀어놓았으니 잘 보라구! 옛날의 자마장 풍경이니까!

왕십리: 궁에서 왕복 십 리에 있던 동네. 국민학교: 초등학교. 파발마: 공무상 연락용으로 쓰이던 말. 자마장: 조선시대에 암말(雌馬)을 먹여 키우던 곳. 부로꼬: 시멘트 블록(일본어). 상량식: 대들보 올리고 치르는 의례. 보로바꾸: 골판지로 만든 상자(일본어). 타마구: 타르(일본어). 하꼬방: 판잣집(일본어). 구멍탄: 구멍 뚫린 연탄의 통속어. 도라꾸: 트럭(일본어). 니야까: 손수레(일본어). 화두: 선사(禪師)의 득도를 위한 명상의 주제. 도원경: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선경(仙境). 경전: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 부기(附記): 돌빵집 준공검사


지난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머틀비치(Myrtle Beach)에 머무는 중에 마님을 재워 놓고 나서 굼벵이처럼 슬그머니 돌아 누워 손바닥에 핸드폰을 켜 들고 스파이처럼 검지 끝으로 코딱지 만한 문자 키들을 소리 안 나게 살살 두드리며 밤새는 줄 몰랐다가, 동틀 무렵에 손동작을 멈추니 좁은 화면에 다 볼 수 없이 제법 긴 벽돌집 이야기가 지어졌다. 그걸 바로 메일로 보내고 나서 저녁에 정신 차리고 다시 읽어 보니 군데군데 잠꼬대가 얽혀 든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바쁜 여정(旅程)에 바로 고쳐 쓰기가 어려워 여행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수정해 새로 보낼까 했는데, 그때가 되면 까맣게 다 잊어버린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도 거북할 것 같아서 간간이 보충 설명을 덧 붙였다.


내가 국민학교 일 학년 때 학교 가는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다섯 시 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집 앞 배추밭에 있던 무허가 움막에 살던 아이와 가끔 놀 때 본 집이 얼기설기 나무 대기를 못으로 박고 비닐로 방수한 단칸방이었는데, 우리 집 보다 높은 곳에 살았던 수재민들의 방도 양회포(洋灰包)를 깔고 신문지로 도배한 것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에, 모두 당시에 흔했던 건자재(建資材)가 허름한 하꼬방처럼 묘사했다. 정원이 있었던 우리 집은 전혀 달랐지만, 수재민촌 사람들은 아침에 모두 공중변소 앞에 줄을 서야 했고, 매일 우물물을 길어다 바께쓰(플라스틱 항아리)에 담아 두고 마셨다.


벽돌집 아이들이 "도라꾸에 매달려 가다가 운전사에게 볼 터지게 맞았다"는 이야기는 나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또 "목욕탕에도 가 본 적 없이 어둡고 비좁은 벽돌집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살았다"라고 한 것은 5 학년 때 선생님이 "목욕탕에 안 가 본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시니까, 그 아이들이 손을 들었기 때문에 '목욕탕에 갈 필요도 없이 한증막(汗蒸幕)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했다.


서울 근교와 변두리의 택지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반에 자양동은 물론 주변지역의 논밭을 쓰레기로 매립하고 야산들도 불도저로 밀어 없앨 때, 벽돌집도 헐려서 아이들이 떠나고 미꾸라지와 뱀들도 모두 매장당했는데, 그래도 살아서 피난 간 생물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희망에 개구리들을 끌어들여 거기서 멀지 않은 강변에서나마 슬픈 노래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사회상(社會狀)을 비판적으로 보고 소외 계층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때의 일에 대해 피력한 감정 역시 어린 시절에 느낀 나의 감정이 아니고, 다만 과거에 평범하게 보았던 사건들에 대해 뒤늦게 되새겨 좀 미화된 지금의 감정을 이입한 것이다.


벽돌집 이야기에 이렇게 나의 상상(想像)이 첨가되긴 했지만, 사실과 먼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벽돌집 아이들보다 더 불쌍했던 사람들의 실상까지 적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적으려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착취(搾取)와 불평등에 소화불량 일으키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미언(微言)에 그쳤다. 어찌 쓴 이야기든 간에 다 읽고 나서 개구리들이 불러 주는 슬픈 옛 노래가 가슴 찡하게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글의 대의(大義)는 밝힌 셈이다.


이번 여행은 자연경관 못지않게 예속(隸屬)과 착취, 불평등과 인권 투쟁 그리고 경제와 전쟁에 얽힌 미국 역사에 초점을 두고, 조지아 주(州)에서 시작하여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테네시, 캐롤라이나 주들을 주유(周遊)하는 것인데, 이런 주제(主題)가 내가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벽돌집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 같다.


- 미국을 떠나며, 2012년 6월 4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톤, 6월 6일 조지아의 사바나, 6월 8일 애틀란타에서 작은 시간을 모아 가필(加筆)하다.


* 미언대의(微言大義)란 공자(孔子)가 중국 고대의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편찬할 때, 간단한 언급[微言]을 통해 원대한 의미[大義]를 드러냈다 하여,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도 한다. 역사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이런 필법을 자기 나라인 중국에 이로운 것은 보이고 안 좋은 것은 감추는 역사 서술의 편법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미언에 그쳤으나, 대의는 밝힌 셈이다."라고 쓴 것은 감춤의 의미가 아니라, "쓰여진 것 보다 더 넓고 깊게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매거진: 다시 쓴 편지 / 숨은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금상화(錦上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