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14
록키산맥을 따라 남행하는데 어느덧 해가 기울어 팽귀치(Panguitch)라는 마을에서 이틀간 묵으며, 형형색색의 기암들이 가득 차 있는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과 거기서 멀지 않은 코다크롬배이슨을 관람했다.
아침에 브라이스캐년으로 가는 길에 황갈색의 바위들이 기둥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사진에서 본 브라이스 캐년과 흡사해서 다 온 줄 알고 차를 세우고 열심히 사진 찍다 보니, 엉뚱하게도 레드캐년(Red Canyon)이란 푯말이 박혀 있다. 긴가 민가 의심하며 지도도 펴 보고 길 따라 20 킬로를 더 들어가니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Bryce Canyon National Park)이다.
브라이스캐년의 계곡 안은 우뚝 선 바위들로 가득 차 있다. 결국은 같은 바위들이라도 보는 지점과 해의 높이에 따라 형색을 달리하는 까닭에 캐년의 가장자리를 따라 여러 곳에 주차장과 전망대가 있고, 캐년 아래로 내려가는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며 산책도 할 수 있는데,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워서 감히 내려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리조나와 유타의 여러 공원들에서 유사한 바위들을 숱하게 보았으나, 이곳에서 본 것들은 나란히 줄지어 삐죽삐죽 솟아 있어서 마치 무수한 군중이 모여서 소리치는 듯하다.
가끔씩은 기둥처럼 우뚝 솟은 바위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가 땅으로 떨어진다. 굉음과 함께 땅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이 광경을 멀리서 보니 아래 내려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는 사고가 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데 다행히도 낮에는 이런 불상사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낙석이 떨어지는 것은 주로 밤이란다.
공원 관람은 캐년 주변 도로를 달리다가, 가끔씩 내려서 캐년 안의 경치만 보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 여유 있게 쉬면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공원 식당 옥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 있는 테이블에는 미국인 부부 여럿이 모여 있는데, 특히 사모님들이 큰 소리로 연설하고 주인님들은 조용히 경청만 하고 있다. 사모님 다섯이 공처가 다섯을 끌고 와서 무슨 수련회를 다하냐? 남편들을 동정 어린 눈으로 흘낏 바라보고는 속으로 낄낄대며 앉아 있으니, 우리 마님이 커피를 쟁반에 받치고 와서 테이블 위에 놓고 초콜릿도 좀 사 올 테니까 기다리라며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신다.
잠시 후, 마님이 다시 쟁반에 초콜릿을 받쳐 들고 와서 사람이 많아서 줄 서 있느라고 늦었다며 자리에 앉는데, 전부터 나를 째려보던 옆 테이블의 한 사모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언성을 높이신다. "아니? 무슨 남자가 손가락 하나도 꼼짝 안 하고 갖다 바치는 것만 먹고 앉아 있어요?"
남의 집 사모님이 겁도 없이 우리 마님의 주인님께 꾸중을? 엄청 놀랐지만 좀 미안한 생각도 들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모범 남편이 아니거든요. 낄낄!" 그러자, 이번엔 공처가님 쪽에서 테이블을 주먹으로 탁 치고 한 주인님이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다가온다. 드디어 사모님께 사과 잘못하고 심복인 남편 손에 끝장나는구나. 심장이 떨려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긴 의자 끝으로 궁둥이를 뺐더니, 내가 앉은자리까지 와서는 고개를 떨군다. 늑대도 아니고 곰도 아닌 큰 눔이 또 내 앞에서 묵념을 하니 간이 콩알만 해졌다.
주먹이 날아오는 줄 알고 눈을 감고 기절할 준비를 하는데 손을 덥석 잡으며, "선생님, 비결이 뭡니까? 제발 가르쳐 주세요!" 한다. "네? 무슨 비결을?" 눈을 뜨고 안도와 놀라움에 되물으니, '와이프 다루는 비결'이란다. 좌중을 둘러보니 씩씩거리는 사모님의 성난 눈초리와 뭔가 공처가 5인의 기대에 찬 미소! "저 불쌍한 남편들을 한평생 웃게 해 주자!"는 생각이 번쩍 든다.
"좋습니다, 형씨들 안에 들어가서 강의를 드리는데 1인당 100$입니다." 다섯 명이 우선 선금으로 각자 50$씩 도합 250$를 테이블 위에 놓고 모두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수업료 챙겨서 따라 들어가며, "강의 끝나고 나면 당신네 남편들이 다 나같이 될 겁니다. 낄낄!" 했다.
내 말에 놀란 사모님들이 우리 마님께 정말이냐고 되 물었다. "네! 내 친구 남편들도 강의 듣고 나서 다 저분처럼 됐어요! 호호호!" 열 받으신 사모님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남편들처럼 250$를 더 얹으며, 강의하지 말고 그거 더 받고 그냥 가 달란다. 사모님 돈이야 받을 수 있지만, 불쌍한 남편들 수업료는 돌려줘야 될 것 같아서, 250$를 움켜쥐고는 돈 돌려주고 온다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들은 내가 돈을 돌려주고 간다니까, 전원이 250$를 더 걷어주며 수업료 다 냈으니 당장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협박한다. "그럼, 사모님께 받은 돈 돌려주고 올 때까지 가다리세요." 또 급하게 강의료 전액을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가서 사모님들께 500$를 보여 주니, 준비했다는 듯이 500$를 채워 주며 당장 안 가면 죽인다고 우리를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초콜릿도 못 먹고 1000$만 챙겨서 자리를 떴다.
공원을 빠져나와 급히 서둘러 코닥크롬배이슨(Kodachrome Basin)으로 향했다. 그곳은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길이 텅 비어 있었는데 곧 작은 마을이 나왔다.
시속 25마일이란 경고판이 길에 세워져 있었지만 차도 없고 조용해서 넓은 교차로를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때 길가에 숨어있던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를 쫓아온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마님께 경찰이 쫓아오니까 차를 세워야 된다고 하니, 우리 잡으러 온 거면 경찰이 우리를 앞질러 가서 차를 세울 거라며 가속페달만 열심히 밟는다 - 꼭 언제 이런 미국 영화를 본 것처럼. 그래도 순찰차가 바짝 뒤 쫓아오는 것이 심상치 않아, 마님을 설득하다 못해 애원까지 했는데도 마님은 내 말에 콧방귀만 뀌신다. 어디에 이런 마님 길들이기 강의가 있으면 1000$ 주고라도 꼭 교육을 받고 싶은 심정이다.
경찰도 그렇지, 경적은 안 울리고 침착하게 사이렌만 울리며 끈질기게 쫓아온다. 아무래도 경찰이 총이라도 쏘아서 타이어에 펑크를 낼 것이 틀림없다. 마님! 뒤 차와의 거리가 5미터이옵니다! 백미러에 딱 달라붙은 순찰차를 보고 마님이 마침내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가 차에서 내려 뒤에 선 순찰차로 다가가니 차에서 나온 경찰이 권총을 빼들고 차 안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친다. 겁이 나서 냉큼 들어가 앉았더니 운전석으로 다가와 운전면허증을 보잔다. 유럽에서 오셨군요? 친구들한테 보여 줄 기념품입니다. 100$짜리 벌금 딱지를 주면서, 자기하고 추격전 벌인 건 봐주는데 시내에서 과속운전 한 건 봐줄 수가 없단다.
집도 한 채 없는 텅 빈 사거리가 시내예요?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했더니, 그게 50$ 깎아 준 거니까 미국 떠나기 전에 납부하란다. 개가 다 웃을 일이다. 그런데, 어라? 구경꾼이 있어서 앞을 보니 진짜로 개가 와서 웃고 있네 - 나중에 사진을 보니 그건 여우였다.
코다크롬배이슨으로 들어가니 브라이스캐년과는 아주 다른 경치가 전개된다. 우선 우리 말고 관광객이 한 명도 없고 적갈색의 기암들이 몇 개 서 있는 풍경은 브라이스캐년에 비하면 그림 없는 그림이다.
관광안내서를 보면서 공원 안의 산책로를 따라 언덕길을 오르니 공원 입구에서 보이지 않던 적갈색의 기암들이 삐죽삐죽 땅 위로 솟아오른다. 붉은 바위들이 뭉실뭉실 뭉쳐있기도 하고 머리가 희끗한 바위들이 죽순처럼 솟아 있기도 하다. 키 작은 나무들 곁에는 가끔씩 풀도 있고 야생화도 피어 있다.
공원 안을 산책하다 보니 산토끼가 근처 풀 밭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발소리 죽이고 가까이 가서 보니 잭레빗(Jack Rabbit)이라는 산토끼인데 귀가 유난히 크다. 그 귀 안쪽 표피에 혈관이 많은데 여기에 흐르는 혈액이 자동차의 라디에이터처럼 열을 발산해서 체온을 조절한단다.
계획했던 모든 국립공원들을 모두 다 봤으니 이제는 라스베가스로 돌아가야 하는데, 코다크롬배이슨에서 받은 과속운전의 벌금부터 내야 하기 때문에 아침밥 먹고 바로 팽귀치에 있는 법원에 갔다.
법관님의 따끔한 훈계가 겁이 나서 기죽은 표정으로 법원 문을 여니, 나이 지긋하신 아줌마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사무실로 안내하신다. 책상 두 개가 있는 넓은 사무실에 법관님은 아직 출근을 안 하셨는지 비어 있는데, 아줌마 책상 위에는 커다란 유리병에 울긋불긋한 '알사탕'이 가득하다. 단 것을 보니 애들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아줌마의 얼굴이 더욱 인자해 보인다.
말만 잘하면 벌금 안 내도 될 것 같은 그분 모습에 기대를 걸고 딱지 받은 상황을 우습게 설명드리니, 거기 오는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찰관에게 같은 식으로 걸린다는 것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며, 100$를 내놓으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 사탕발림이다.
결국 쏠트래이크시티의 주차장에서 죠지 크루니가 던져준 11조 헌금봉투를 뜯었다. 어떻게 우리가 꼭 100$의 벌금을 낼 줄 알고 봉투에 넣었을까? 이 사람을 꼭 만나서 따져 봐야겠다.
헌금을 접수하신 아줌마는 마님의 이름과 생년월일, 범행 장소 등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벌금 낸 영수증을 마치 상장처럼 뻣뻣한 종이에 인쇄해 주셨다. 그걸 꾸기지 않게 두 손으로 받으신 마님은 액자에 넣어서 길이 보전하자며 법원을 나왔다. 세상에 11조를 뜯어가는 법원이 다 있냐?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가는 길은 빠른 고속도로보다는 3주일 전에 갔던 자이언 국립공원을 통과하는 국도를 선택했다. 꼭 상장을 받은 뒤부터 가속페달을 밟는 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자이언을 통하는 길이 풍치도 있고, 나중에 라스베가스로 가는 고속도로에서도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팽귀치를 떠나 한가한 시골길을 따라 내려가니 푸른 나무 뒤에서 간간히 브라이스캐년에서 보았던 것처럼 붉은 군상들이 얼굴을 내밀고, 풀이 무성한 초원에는 양 떼와 소들이 풀을 뜯는다.
마침내 자이언 국립공원으로 들어오니, 그랜드캐년을 향해 3주일 전에 떠났던 길을 다시 밟는 것이 마치 추억의 길로 돌아온 것처럼 반갑게 느껴진다.
자이언을 떠나던 날 아침, 호텔 앞 잔디밭에서 한 할머니에게서 피칸(Pecan: 호두의 일종) 1파운드(500그램)를 샀는데, 마침 바닥이 나서 그때 일러 주신대로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온 우리를 반가워하시며,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둔 마지막 호두 1파운드를 꺼내 주셨다.
집을 나오자 곧 봉지에서 고소한 호두를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살살 깨물면서 백미러에 비친 자이언의 거봉들을 보니, 계획했던 서부 국립공원 탐방을 제대로 마친 기분이 상쾌하다. 이제는 원 없이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도 되겠다. 우리의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줄 환상의 도시! 라스베가스를 향하여...
- 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기/바로가기 -
6. 그랜드캐년 사우스림(+우팥키공원과 화산, 메테오르 크래이터, 윈슬로)
11.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을 향하여(+그랜드테튼 국립공원)
13. 쏠트레이크씨티(+그레이트쏠트레이크, 빙감캐년마인)
14. 브라이스캐년(+코다크롬배이슨, 라스베가스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