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을 빠져나와 마님이 운전석에 앉아 가속페달을 밟으신다. 수강료 떼어먹고 급히 달아나는 게 아니라... 해가 지기 전에 어서 코닥크롬 베이슨(Kodachrome Basin)을 보기 위해서다. 관광객이 별로 없는 곳이라 텅 빈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니, 곧 작은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시속 25마일이란 경고판이 길에 세워져 있지만 집도 없고 차도 없는 넓은 교차로를 지나고 나니까, 길 옆에 있던 순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 뒤를 쫓아온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마님한테 경찰이 쫓아오니까 차를 세워야 된다고 말하니까, 우리를 잡으러 온 거면 경찰이 우리를 앞질러 가서 경고할 거라며 마님은 순찰차가 가까이 올수록 가속페달을 더 열심히 밟는다. 꼭 언제 이런 미국 영화를 본 것처럼... 그래도 순찰차가 바짝 뒤 쫓아오는 것이 심상치 않아, 마님께 서 달라고 설득하다 못해 애원까지 하는데도 마님은 내 말에 콧방귀만 뀌신다. 어디에 이런 마님 길들이기 강의가 있으면, 조금 전에 받은 100$를 다 주고라도 꼭 강의를 듣고 싶은 심정이다.
경찰도 경적은 안 울리고 침착하게 사이렌만 울리며 끈질기게 쫓아온다. 아무래도 경찰이 총을 쏴서 타이어에 펑크를 낼 것 같아 내가 소리친다. "마님! 뒤 좀 보시옵소서!" 백미러에 눈을 돌려 딱 달라붙은 순찰차를 보신 마님이 마침내 브레이크를 밟는다.
내가 차에서 내려 뒤에 선 순찰차로 다가가려니까, 차에서 나온 경찰이 권총을 빼들고 차 안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친다. 겁이 나서 냉큼 들어가 앉았더니, 운전석으로 다가와 운전면허증을 보여 달란다. "유럽에서 오셨군요? 친구들한테 보여 줄 기념품입니다." 경찰은 100$짜리 벌금 딱지를 주면서, 자기랑 추격전 벌인 건 봐주지만, 시내에서 과속운전 한 건 어쩔 수가 없단다.
"집도 한 채 없는 텅 빈 사거리가 시내예요?"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했더니, 그게 50$ 깎아 준 거니까 미국 떠나기 전에 납부하란다. 세상에! 개가 다 웃을 일이다. 그런데, 어라? 구경꾼이 있어서 앞을 보니 진짜로 개가 와서 웃고 있네. 나중에 사진을 보니 그건 여우였다.
코다크롬 베이슨으로 들어가니 브라이스 캐니언과는 아주 다른 경치가 전개된다. 우선 우리 말고 관광객이 한 명도 없고 적갈색의 기암들만 몇 개 서 있고, 규화목도 홀로 서 있는 풍경은 브라이스 캐니언의 무수한 군상들에 비하면 너무 적막해 보인다.
공원 안의 산책로를 따라 언덕길을 오르니, 공원 입구에서 보이지 않던 적갈색의 기암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붉은 바위들이 뭉실뭉실 뭉쳐있기도 하고, 머리가 희끗한 바위들이 죽순처럼 솟아 있기도 하다. 키 작은 나무들 곁에는 가끔씩 풀도 있고 야생화도 피어 있다.
공원 안을 산책하다 보니 산토끼가 근처 풀 밭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발소리 죽이고 가까이 가서 보니 잭레빗(Jack Rabbit)이라는 산토끼인데 귀가 유난히 크다. 근처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그 귀 안쪽 표피에 혈관이 많은데, 거기에 흐르는 혈액이 자동차의 라디에이터처럼 열을 발산해서 체온을 조절한단다.
우리가 계획했던 서부의 국립공원들을 모두 다 봤으니, 이제는 마음 가볍게 라스베이거스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벌금 딱지를 준 경찰이 미국을 떠나기 전에 법원에 가서 벌금을 내라고 권고했으니, 우리는 아침밥 먹고 바로 팽귀치에 있는 법원으로 간다.
법원 문을 여니까, 나이 지긋하신 아줌마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사무실로 안내하신다. 책상 두 개가 있는 넓은 사무실에 판사님 자리는 비어 있는데, 아줌마 책상 위에는 커다란 유리병에 울긋불긋한 '알사탕'이 가득하다. 우리가 벌금 딱지 받은 상황을 잘 설명하면 벌금 안 내고 사탕만 받고 나올 것 같다.
"집도 없는 곳에 속도를 25마일로 제한해 놓고, 숨은 경찰관이 지나가는 차를 잡아서 벌금 딱지 주는 게 혹시 장난이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질문하니까, 아줌마는 벌금 내러 온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한다며, 100$를 내놓으라고 엄숙하게 대답하신다.
지갑을 열고 보니 솔트래이크시티의 주차장에서 받은 봉투가 접혀 있어서, 뜯어봤더니... What else! 클루니가 어떻게 미리 알고 100$를 봉투에 넣었을까? 이 사람을 꼭 만나서 따져 봐야겠다.
벌금을 접수하신 아줌마는 마님의 이름과 생년월일, 과속 운전 장소 등을 컴퓨터에 입력해서 벌금 낸 영수증을 마치 고속 운전자 표창장처럼 두꺼운 종이에 크게 인쇄해 주신다. 그걸 받으신 마님은 집에 돌아가 액자에 넣어서 길이 보전하자고 하신다. 나도 유리병에서 알사탕을 한 알 꺼내어 입에 물고 즐겁게 법원을 나온다.
팽귀치의 아름다운 거리를 천천히 관통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3주일 전에 지나 온 자이언 국립공원을 향해 달려간다. 고속 운전자 표창장은 이미 받았으니까...
팽귀치를 떠나 한가한 시골길을 따라 내려가니 붉은 바위들이 얼굴을 내밀고, 풀이 무성한 초원에서는 양 떼와 소들이 풀을 뜯는다.
마침내 자이언 국립공원으로 들어오니, 마치 추억의 길로 돌아온 것처럼 반갑게 느껴진다.
3주일 전에 자이언 국립공원을 떠나던 날 아침, 호텔 앞 잔디밭에서 한 할머니에게서 피칸호두 1파운드를 샀는데, 이제 다시 지나가는 길에 그 할머니가 사신다는 집을 찾아가니, 할머니는 잊지 않고 다시 찾아온 우리를 반가이 맞으며,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둔 마지막 호두 1파운드를 꺼내 주신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서, 고속도로로 들어와 줄곧 대형트럭들의 짜릿한 경적을 들으며 사막길을 달린다. 환상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