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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ug 03. 2021

[리뷰]강등되는 특별함

랑종을 통해 보는 기형적 일상성

한국어가 아직 서투르니 혹시 오타가 있을 경우 리플로 알려주세요. 또한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읽어주세요.


랑종은 2021년에 개봉한 공포 스릴러 영화다. 태국의 이산지역을 배경으로 여자들에게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한 무당 가족의 기괴한 현상들을 그린 작품으로,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기획/제작하고 셔터와 피막의 반종 피산다나쿤 (บรรจง ปิสัญธนะกูล, Banjong Pisanthanakun)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의 제목인 랑종(ร่างทรง, RANG ZONG)이 대변하듯 이 영화는 신내림의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에 따른 일상적 모습들의 기괴함을 통해 동물과 인간, 영혼과 물질 세상의 매개와 무시되어 오던 혹은 눈치채지 못한 일상성의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랑종은 나홍진 감독의 다른 작품인 곡성과 함께 보아야 그 의미가 더 확실해지기도 하는 하나의 시리즈 물로 보이며, 그것이 감독의 의도와 다르다 할 지라도 두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는 그 맥락을 함께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큰 맥락 안에서 영화를 읽어 내려갔을 때 이 영화에는 크게는 세 개의 흐름의 교환이 있다고 보여진다. 세 개의 흐름 중 하나는 무당 혹은 랑종이라고 불려지는, 외부와 내부의 중간에 위치한 ‘님’의 흐름, 일상성을 대변하며 그 일상성 속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노이’, ‘마닛’, 그리고 ‘팡’,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범함에서 특별함으로 강등되는 ‘밍’의 흐름. 이 세 개의 흐름은 서로 뒤섞이고 결국 마지막에 하나의 동물적 물질성으로 부딪치고 혼합되는 데 이를 통해 이 영화는 평범함 속에 내재된 기괴함과 외부성을 끌어냄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가장 먼저, 랑종의 첫 시작은 ‘님’과 이산지역의 배경 설명으로 시작한다. ‘바얀’이라는 조상신을 섬기고 있는 님은 카메라의 시선 안에서 무당의 능력을 가진 것 외에는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시골의 한적한 길가의 화려하지 않은 2층 건물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녀는 무당의 일을 하며 함께 옷을 수선하는 일로 돈을 버는데, 영화 안에서 보이는 이러한 그녀의 상황은 무당이 주 직업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수입이 크지 않으며 무당은 그녀에게 있어서 순수하게 ‘바얀’이란 조상신을 섬기기 행위 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와 반대로 그녀가 ‘바얀’을 위해 드리는 제사의 모습은 문화적 차이와 그 의식의 시각적 강렬함으로 인하여 일상적 모습, 평범하게 일을 하고 특별한 무당의 옷을 입지 않는 모습들과 부딪치는데 이는 말을 그다지 하지 않는, 그래서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을 주는 그녀의 성격과 함께 그녀를 일상적이면서 외부적인 특별함 속에 위치시킨다. 무당은 인간 사회에서 고대부터 특별한 위치에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신의 의지 혹은 메시지를 물질 세상의 언어로 전하게 할 수 있는 물질화의 전 단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무당은 인간과 신의 그 중간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며, 물질과 비물질을 동시에 보는 자, 인간과는 다른 어떤 존재, 가장 동물성에 근접한 존재, 순수한 물질체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세상에서의 위치는 가족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의 형부 위롯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족과 특별한 교류 없이 살아가면서도 세상 속에서 속세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바얀’의 존재에 대해 보지 않아도 믿는, 다르게 말하면 특별함을 평범함으로 강등시켜버리는 그녀의 존재를 부각하는 그녀의 위치를 보여준다.


님과 반대 위치에 존재하는 것은 속세를 대변하는 ‘노이’와 ‘마닛’ 그리고 ‘팡’이 있다. 그들은 속세의 일상성을 보여주면서도 극도로 기괴해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들의 시선은 영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에 한계 되어 있으며 그들의 그러한 도피적 시선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혼들”, 혼의 동물성, 일상의 비 물질성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님의 언니이면서 가장 먼저 바얀의 부름을 받았던 노이는 극도의 거부를 통해,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드러나듯, 동생의 희생을 통해 일상성을 유지시켰으며 위태롭게 유지되는 그녀의 정상적인 삶은 처음부터 특별함 속에서 쌓아 올려진 것이었다. 노이의 가족들을 다루는 장면에서 가장 특이하게 보이는 지점은 특별하지 않게 언 듯 언듯 보이는 일상의 기괴함이다. 영화의 도입 부분 다큐멘터리 제작진들은 노이와의 짤막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그녀의 인터뷰 장면은 그녀가 하는 불법 개고기 가게를 무심한 듯 뒷 배경으로 사용하며 느껴지는 이중적 거부감, 집 안에서는 강아지 ‘럭키’를 반려견으로 키우면서도 자신의 일상 밖에 위치한 생명, 물질, 혹은 비물질에 관해서 보여지는 지나칠 정도의 무신경함,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상성을 역시 무심한 카메라의 시선 안에서 담아낸다. 어떤 의미로, 이러한 노이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과 닮아 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차가운 듯한 이러한 시선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답답함을 초래한다. 어째서 보면서도 알지 못하는 가? 어째서 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는가? 한편 신 바얀은 간섭한다. 물론 영화 내에선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바얀은 님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밍에게 꿈을 보여주는 등의 간접적인 도움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간섭하지 않는다. 일정하게 거리 둔 그 냉정함은 카메라를 조작하는 제작진 그 스스로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극대화된다. 이제 카메라의 시선은 더 이상 조작자에 의해 들려있지 않는다. 그저 흐트러지지 않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자신의 부인인 ‘팡’과 아직 어린 아들인 ‘퐁’을 두고도 젊은 여자들과 술을 먹고 있는 마닛의 모습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성당의 종교적 예배는 그저 하루하루의 배경 중 하나로 지나쳐진다. 밍의 부자연스러움 또한 여러 신내림 중 하나의 의식적 과정으로 강등된다.


이러한 모든 과정 속에서 ‘밍’은 순수한 강도를 보여준다.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단지 악귀에게 씌는 어떤 한 사람과 그의 처절한 동물성으로의 퇴행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로 그녀는 환경을 반사하는 반사적 거울이며 주변부에 존재하던 동물성을 중심부로 이끌어오는 다른 의미의 랑종인 것이다. 시선적 물질화로 이끄는 님과 카메라와 다르게 밍은 행동과 언어로 외부성을 매개시킨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이는 밍은 매우 평범함과 동시에 인생의 특정 시기에서 볼 수 있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자신의 젊음을 즐기면서도 착실하게 이른 아침에 일을 나가러 가는 그녀는 그녀의 외부에 존재했던 기괴함과 특별함을 미신으로 치부하면서도, 귀신을 그리고 자신의 신내림에 대한 운명을 두려워하는 그녀는, 두려움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외부에 존재하던 님이 서서히 내부로 들어오지만 외부의 시선을 공유하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밍은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는 지점에서 내부와 외부를 모두 폭발시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파열시키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의 신체가 하혈을 통해 내부에서 외부로 그리고 성관계를 통해 외부에서 내부로 열림과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의 신체를 여러 지점에서 자해한다. 감정을 분노로 집중하고 그녀의 신체는 스스로를 공격하며 무차별적인 성관계를 통해 동물성을 외부로 방출시킨다. 여러 행위가 역사 속의 미신적 여성성과 시각적 연결이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성적 충동이 부재하는 그녀의 행위들은 다만 동물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녀의 기행이 더 진행됨에 따라서 파열의 범위는 그녀 자신을 넘어선다. 그것은 이제 그녀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노이와 마닛의 기행성의 폭로로 이어진다.


퇴마사가 마지막에 약간의 설명을 부가하기는 하지만 밍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짐에도 상황을 증언하는 자는 없다. 누구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하지만 증인은 존재한다. 모두가 증인인 동시에 행위자가 된다. 카메라의 시선과 죽기 직전의 님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외부의 시선의 매개체가 된다. 노이와 마닛은 스스로의 일상 중의 기괴함을 드러 낸다. 퇴마사들과 남은 다큐멘터리 제작진들은 스스로를 시선 안으로 노출시킨다. 어떤 의미로, 마지막 순간에, 모든 상황이 서서히 드러나고 모든 것들이 파괴되기 직전에, 모든 이들은 랑종이 된다. 이제 랑종은 더 이상 님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님 만이 죽음을 통해 랑종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는 동물성, 외부성, 그리고 특별함은 무엇인가?  왜 이 영화는 외부와 내부의 철저한 교환을 이다지도 폭력적으로 그려내는가? 많은 공포 영화들이 일상생활에 침투하는 외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린다. 그것이 귀신이 되었든 인간과 형체가 다른 인간성이 배제된 괴물을 그리든 혹은 이미 내재되어있던 강등된 특별성을 그리든, 공포 영화는 인간의 심리가 가지고 있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가능성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감을 이용한다. 동물성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을 대표한다. 논리와 인과를 벗어난 그 밖의 존재들, 그것은 대체로 미지의 것, 사회와 자연의 양분된 공간 중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들을 보여 준다. 그것들은 특별하다 혹은 특이하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또한 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랑종 안에서 이러한 동물성은 산재한다. 동시에 내부라고 일컬어지는 이성적 문명적으로 대표될 수 있는 시선이 동물성은 철저하게 분리된 시선 안으로 위치시킨다. 


어떻게 보면, 동물성이 인간의 신체로 드러나고 대다수의 인간성이 파괴되는 마지막 순간,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 랑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의 목표지점이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비록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체적 특성, 즉 영상과 관객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되는 특성으로 인해 진정한 랑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거리감을 벌려버리는 시각적으로 잔인한 장면들은 관객이 영화 속에서 위험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더 강조시킨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공포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시키며 진정한 공포감으로 깊숙이 침투하지는 않는다. 시각적으로 잔인한 장면들은 화면의 분리를 넘어서기에는 불충분하다. 심리적으로 충족되었던 긴장감은 시각적 동물성에 의해 오히려 그 혼합을 막아버린다. 물론 그것은 아마도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위험성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개된 위험성의 원거리 공포감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증인이 되지만 또 다른 의미로 증언하지 않는다. 특별함의 강등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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