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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ug 08. 2021

[리뷰] 샌드 캐슬 Sandcastle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한 작은 모래성


저 모래성은 내일도 있을 수 있겠지. 그리고 우린, 우린 벌레들처럼 사라져 버릴 거야. (Sandcastle, p. 76)


시간이란 주제는 미디엄 중에서도 필름과 가장 연관되어있다. 필름은 처음으로 시간의 연결성을 시각화할 수 있는 예술적 도구임과 동시에 필름에 색인으로 기입되어있는 시간을 도구로 공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이트 샤말란 (M. Night Shyamalan)이 시간에 대한 영화 ‘Old’를 만든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았음에도 그 원작이 그래픽 노블이란 점에서 약간은 충격으로 돌아왔다.  우선 중요한 점은 이 그래픽 노블의 작가가 피에르 오스카 레비 (Pierre Oscar levy), 영화감독이라는 점이며 그가 그래픽 노블 작가 Frederik Peeters와 함께 한 작업이 바로 Sandcastle (2011)이다. 총 108 페이지로 이루어진 이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회오리처럼 사건들을 이끌고 간다. 책에는 시간을 묘사할 수 있는 도구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오로지 변화를 통해서만 시간을 흐르게 하며 그러한 시각적 변화는 이 그래픽 노블에서 나이라는 주제와 함께 극대화된다. 이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소설과 만화적 상상의 영화화가 아닌 영화적 상상에 대한 그래픽 노블화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고민해본다.


이야기


짧은 스토리가 한 곳의 해변을 각각의 작은 프레임들은 마치 카메라의

시선처럼 쪼개져버린 여러 해변의 지점들을 그리는 것처럼 시작한다. 어떤 한 여인이 그 해변에 이미 도착해서 수영하는 것과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한 남자를 보여준다. 다이내믹한 아시아 만화들의 프레임과 다르게 영미권의 그리고 유럽의 그래픽 노블의 프레임들은 매우 담담하다. 감정적이지 않은 프레임들은 마치 영화가 시간을 무덤덤하게 일정하게 쪼개어 버리듯 한 프레임씩 장면을 시선을 쪼게어 버린다.


시간은 8시 03분. 이것은 한 가족이 그 해변에 도착한 시점이다. 이 시점 이후로 우리는 시간을 알 수 없다. 한 가족이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풀을 향해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딸 조이를 향해 아빠가 소리 지른다.


네가 더 컸을 때는 그 잡초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게다!


다음 프레임 (장면?)에서 그녀의 아빠를 뒤돌아 보는 조이의 놀라는 시선 그리고 강아지의 짖음. 그 시선과 소리는 멈추어 있다. 영화와 다르게 그 시선에는 정해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래를 통한 현재 시점에 대한 강조는 이 이후에도 그들이 스스로의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온다. 끊임없는 미래에 대한 생각, 계획, 그리고 환상. 현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듯이 미래도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 이러한 상상은 웃기게도 가장 어린 이와 가장 나이 많은 이를 통해서 깨어진다. 펠릭스의 급속한 변화가, 아직 나이가 먹는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그 어린아이의 신체적 변화가 시간에 대한 약속을 깨버린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다른 이들의 발견에 의해 뒷자락에서 조심스럽게 숨을 거두는 그 불편함을 통해서 현재 또한 얼마 남지 않음을 깨우친다. 그렇기에 여러 사람들이 그 해변을 나가기 위해서 시도한다. 그림에서 보이기에 다른 특별한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에 해변이 있고 반대편에는 넓은 들판이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절벽이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무엇인가가 그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다른 어린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어른으로서의 삶을 즐기고자 한다. 임신과 알츠하이머, 그리고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아이의 탄생.



밤이 되어 모두가 자기 나름 대로의 그룹을 만들어 마음의 안식을 찾고 있을 때, 나에게 가장 무섭게 다가온 것은 그 누구도 새로운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다시 낮이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무서워하고 또한 받아들이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감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감옥 안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더욱더 현재가 되어간다. 자신의 손등 위에 생긴 세월의 흐름 (아니 여기선 아마도 시간의 흐름)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로 드러나는 변화의 징후들. 휘몰아치는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 후에 돌아오는 것은 현재의 나, 조금 전과 다른 나, 몇 페이지 전 (그것이 1초가 되었든 2분이 되었든 혹은 1주일이 되었든)과 다른 나를 인식하며 그들 스스로가 감옥을 만들어간다.


날이 밝아온다.


마지막까지 이 그래픽 노블의 프레임은 시네마틱 하다. 한 명씩 한 명씩, 한 물체와 한 장면씩, 그리고 극히 현재인 새로운 아이가 마지막에 살아남은 그 지점까지 클로즈업된다. 지극히도 시네마적인 리듬은 실체의 경험에서 이루어지는 시간과는 다르다. 시네마에서의 시간은 구성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시간만을 확인할 뿐인 관객은 영화가 구성시킨 시간으로 그 순간들의 건축물을 경험한다. 이 그래픽 노블 안에서는 모든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해변에 놀러 온 사람들이 시간을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 여유롭게 시간의 느긋함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반대로 급격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변화에 놀라고 분노했으리라. 자연은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보다 더 불시에 공격한다. 오히려, 우리가 자세히 보려고만 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이미 우리의 주변에 존재한다. 인간 또한 자연이므로,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변화한다. 시간은 단지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콘셉트보다 더 강력한 이 변화의 힘은 그 누구도 지나치지 않고 파괴하고 또 창조한다.


하지만 난 다시 한번 묻는다. 도대체 마지막 장면에서 지어지는 모래성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새로운 시도의 그래픽 노블은 매우 흥미롭다. 극장과 같은 배경 (해변) 안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재잘거리고 행동하고 변화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제공한다. 또한 시네마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찍는 듯한 분열된 프레임들은 마치 시간을 찍어내리듯 프레임으로 그 주위를 분쇄시킨다. 이 두 가지의 다른 미디엄을 흥미로운 조합으로 구성한 이 그래픽 노블은 또한 매우 구성적이다. 하지만, 도대체 하나의 생명을 남겨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싶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갈 거라고? 아니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 이 마지막 장면은 더 끔찍한, 끝나지 않을 현재를 잔인하게 클로즈업시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그 전 세대는 행복하다. 오히려 스스로 끝을 정할 수 있었던 그 부모들은 스스로의 미래를 정할 수 있는 힘을 지켰다.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나에게 무한의 슬픔으로 보인다. 작은 모래성이 너무나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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