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시선과 합체된 신체
씁쓸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녀가 실재 인물이었는가 아닌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가 폭력적인 가정 속에서 아픔을 참아온 소녀였다던가 결혼 후에도 남다른 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라던가, 혹은 그녀가 평생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내몰린 채 살았다던가.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셜리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녀는 아마도 평생 영화 속의 순간의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는 영화를 글과 함께 본다는 것은 그 이미지를 전복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궁금하다. 셜리가 글 속에서 어떤 쌍둥이를 만들어내고 있을지 영화는 어떤 도플갱어를 아니 도플갱어라고 말하기엔 생김새도 그 에센스도 다른 셜리를 만들어 낼지 궁금했다. 그도 아니면 난 다른 버전의 셜리 또한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 그렇기에 난 글과 이야기가 다른 셜리의 형태를 형성시키기 전에 영화 속에서의 이미지로의 셜리를 적어 놓고 싶다.
Josephine Decker 감독의 Shirley (2020)는 적어도 전기라는 장르 속에 속한다. 스릴러라는 장르 외에도 이 영화는 Susan Scarf Merrell의 동명의 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셜리 잭슨이란 공포 소설가의 일대기 속에서도 그녀가 제비뽑기라는 글로 유명해지고 Hangsaman이란 소설을 쓰는 그 순간을 그리고 있다. 무궁한 나태와 외로움 속에서 몸무림 치는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 스탠리 하이만과 함께 사는 집으로 이제 막 결혼한 로즈와 프레드가 이사 온다. 그들이 타고 오는 기차의 몽환적인 모습은 그들이 이미 환상의 기차를 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프레드에겐 성공한 교수의 그리고 로즈에게는 학교로의 복귀라는 환상으로의 그들의 여행은 거울에 비친 로즈에게 다른 그녀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아니 이미 존재했던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보여주는가.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어떤 것도 명백하지 않다.
이상하리만치 여자들만이 가득한 강의실 속에서 그녀는 스탠리에게서 집안의 가정부라는 원치 않는 자리를 강요받는다. 이때를 시작으로, 아니 처음부터 그녀는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 내내 계속 영화 공간 속에 흩어져 내린다. 그녀는 집안을 떠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1층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셜리의 장난감이 되어 있다. 셜리의 잔인하고도 거만한 태도와 하이만처럼 어느새 집 밖에서 그만의 인생을 만들고 있는 프레드의 존재를 통해 로즈의 존재는 점점 더 지워만 간다. 한 순간에 그렇게 되었다던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던가 혹은 점점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던가, 그런 것들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이 영화 속에서 무의미하다. 로즈가 모든 행위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해체되는 사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셜리는 글을 써내려 간다. 그녀가 글을 써 내려가는 순간인지 1년인지 알 수 없이 흘러가는 분해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소설과 실재를 동시에 유린한다. 셜리가 쓰는 것이 로즈라는 존재 자체일지도 혹은 셜리 스스로가 존재를 써 내려가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는 의심이 떠오른다. 시간의 모호함은 이 영화의 중간중간 셜리의 환상을 통해서 더욱더 강조되고 로즈의 우울증을 통해서 분열되는데, 마치 이를 증언이라도 하려는 듯 카메라의 움직임을 흔들리고 그의 시선은 평온함을 잃으며 신체의 무게는 더욱더 땅으로 꺼지는 듯 그 중심을 잊어 간다. 나는 마녀라고 외치는 셜리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미심쩍게 느껴졌던, 그녀의 방만한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던 그녀의 힘은, 그녀의 존재가 로즈의 젊음을 흡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렇기에 흰머리에서 금발로의 이행이 로즈의 붉은 머리와 대조되었던 흔들의자의 장면은 강렬하고 화려하게 떠오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혹은 무슨 주장을 하고자 하는가. 셜리와 스탠리 사이의 괴상하고 끈끈한 관계? 50년대 여성의 자아성립? 남성의 태생적 혹은 불륜적인 존재적 태생의 한계? 혹은 한 신화적 여성 작가에 의한 호러 소설의 탄생 과정? 아니 처음부터 영화가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이미지는 주장을 하는가? 아니 처음부터 이미지는 말을 할 수 있는가? Hangsaman의 모티브가 된 소녀가 사라졌던 것처럼 영화 속의 메시지가 모두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간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지는 알 것 같았던 의미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로즈와 함께 그리고 영화와 함께 지워져 간다. 아마도 영화 내에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영화에서의 전통처럼 굳어진 듯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의 머리도 나의 눈도 영화가 무엇인가를 깔끔하게 설명해주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주입되는 술과 담배의 향연 속에서 어제인지 오늘인지 실재인지 환상인지도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John Mullarkey가 말한 것처럼 사실 스토리와 주장은 함께 하기엔 서로가 미끄러지는 관계일 뿐이다 Mullarkey, 2009, 18). 주장을 집중할 때 스토리는 흐트러지고 스토리에 빠져들 때 주장은 녹아내린다.
랑종이 매우 깔끔한 주장과 세 명의 각기 다른 위치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과 반대로 셜리는 진행 과정 속에서 4명의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융합을 이루어낸다. 대시 생각해보면 셜리의 다른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 (The Haunting of Hill House)의 느낌도 이와 비슷하다. 공간과 신체가 혼합되어가졌던 힐 하우스의 유령처럼 셜리와 로즈는 혹은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떠날 수 없었던 광장 공포증적 두려움으로 집 안에 묶여 있던 셜리와 착한 아내 (wifey)라는 인식적 공간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로즈는 전혀 다른 두 인격체 혹은 공간으로 만나서 하나의 장소로 신체적인 관계 속에서 합쳐진다. 들뜬 로즈의 핑크빛 뺨이 셜리의 머리카락에 색을 입힌다. 셜리의 무릎이 로즈의 사이로 들어간다. 둘의 시선은 그럼에도 적어도 영화 내에서 겹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둘의 관계는 상상 속에서 그리고 실체의 것에서 버섯을 통해 최대로 합체된다. 로즈가 죽음을 드러내 놓고 두려워하고 공상화 하지 않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셜리는 죽음과 함께 한다. 셜리에게 죽음은 백일몽이자 실체이고 허구이며 현실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버섯을 통해서 그들의 입을 통해 나눠진다.
셜리와 로즈가 동일화되는 것은 시각적 착각으로 보기에는 혹은 인식적 혼동으로 보기에는 그 효과가 강렬하다. 사실 이 영화 내내 이러한 동일화는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스탠리가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등장했던 것처럼 셜리가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마녀처럼 나왔던 첫 시작과는 다르게 결합은 다양한 분리를 통해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다. 질투 많은 디오니소스는 마녀를 중독으로 이끈다. 그의 말은 그의 표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가 글을 쓰라고 외친다. 그가 글이 완성되었냐고 묻는다. 목소리가 신체에서 분리된다. 그리고 그 끝은 마녀가 현실과 상상을 소설의 힘으로 합치는 그 순간 마녀와 춤을 추며 이루어진다. 그녀가 춤을 추었던 것은 스탠리였던가 프레드였던가? 스탠리와 춤을 추었던 것은 셜리였던 건가 혹은 로즈였던가? 프레드가 스탠리의 강의 방식을 모방하고 심지어 스탠리의 병적인 바람까지도 비슷해지면서 둘은 하나의 대명사 “남편” 이란 존재로 압축되어 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들의 ‘남편’으로의 추출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 그저 밖의 시선으로 처리된 것이 약간은 아쉽다. 사실 이러한 분리와 결함이 4명 모두로 이어졌다면 이는 더욱더 흥미로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은 분리와 결합의 또 다른 모습이다. 순박한 처녀, 아름다운 소녀 로즈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절벽 위의 장면에서, 시각적으로 비슷한 옷과 체형을 통해, 두 명 로즈와 셜리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이 복제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시각으로 비슷한 버섯, 그리고 작은 선택으로 갈릴 수 있는 죽음처럼, 소녀를 죽음으로 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은 간단한 발걸음 하나일 뿐이다. 환상 속의 발걸음은 로즈를 새로운 셜리로 이끈다. 그녀의 변화 셜리와의 결합은 깨달음이라고 부르기엔 요란하고 선택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그녀의 신체의 셜리와의 결합은 사소한 목 움직임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로즈의 몸 위에서 셜리를 드러낸다. 그녀는 셜리의 공간을 떠나지만 그녀는 셜리의 아기를 그 몸에 품고 있다. 그것이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와 오직 다른 점 이리라.
References:
Mullarkey, J. (2009). Refractions of Reality: Philosophy and the Moving Image. New York: Palgrave Macmil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