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8년 후

유토피아에 대한 시적 우화

by Moon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잘나가던 90년대 영국 록 앨범이 현재의 음악으로 재해석된 것 같은 영화. 키치함과 스타일리시함, 유머러스함과 감각적 센스가 뒤섞여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되살리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할 만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좀비라는 껍데기로 정치적 메시지를 가리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는 영화. 이것이 내가 『28년 후』에 대해 느낀 인상이다. 이 영화는 좀비 영화로도, 소년의 성장영화로도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지점이 있으며, 좀비 혹은 성장 영화로 해석하면 후반부의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도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분노 바이러스 사태가 발발한 후 약 28년이 지난 시점,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홀리 아일랜드 출신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텔레토비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어린 지미와 다른 아이들이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텔레토비를 보고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안전한 유토피아를 그리는 텔레토비의 세계와 달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서려 있고,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하고 있지만 귀는 뒤편의 소리에 집중돼 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가장 드러내는 첫 번째 시작점이 바로 이 텔레토비와 그 다음 성당에서의 장면일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 한 지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성당으로 달려가고, 그곳에서 광기에 찬 얼굴로 “드디어 때가 왔다”고 기뻐하는 성공회 신부인 아버지 데이비드를 발견한다. 이 두 장면, 텔레토비의 세계와 알 수 없는 분노가 들끓는 현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를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신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버려졌다고 읊조리는 혼란스러운 아이. 이 관계는 영화의 서두에서 가장 큰 메시지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이 영화가 단순히 좀비와 인간의 싸움, 인간의 희망 혹은 인류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가리킨다.


‘28년 후’, 홀리 아일랜드로 시점이 옮겨가며, 강렬한 시작처럼 90년대 영국 록을 연상케 하는 카메라 전환들이 이어진다. 빠르고 리듬감 있는 흐름 속에서 소년 스파이크, 그의 아버지 제이미, 그리고 어딘가 아파 보이는 어머니 아일라의 아침이 그려진다. 짧은 대화와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제이미와 스파이크가 외지로 나가, 아이들의 통과의례로 경험을 하고 돌아올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집에서 마을 길목으로 향하는 길 동안 마을 사람들 모두가 스파이크를 응원하는 장면이 이어지며, 디즈니 영화에서 볼 법한 화목한 공동체의 이미지가 연출된다. 그리고 제이미는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스파이크를 이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모습이 깨지는 순간은, 그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가 메인랜드에 의사가 있다는 것을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른다”는 말, 그리고 그가 미래를 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과거조차 마주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눈을 가린 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극 초반에 등장하는 빠른 비트와 속도감 있는 몽타주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아카이브 영상과 현재 시점이 교차하며 나타나고, 영화가 단순한 좀비물이 아닌 사회비판적 작품임을 분명히 한다. 인간사가 걸어온 길, 우리가 ‘적’이라고 간주한 대상에게 보여준 공격성과 잔혹함, 그리고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한 집단적 본능. 눈을 가린채 안전한 성 안에서 거짓된 완전함을 꾸미는 행동들이 과연 과거 혹은 이 영화 속만의 이야기일 뿐일까?


의사가 멀리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후반부 스파이크가 그 길을 직접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 의사를 찾는 것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위험해서? 의사가 미쳤기에? 그렇지만 그는 과연 그 의사와 대화를 시도해 보았나? 아일라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아마도 그보다는,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마을 사람들과 제이미는 28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많은 죽음을 이미 경험했고, 그를 악이라 규정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피해야 하는 것이며 성을 쌓아 싸워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이미는 가장 가까웠던 이의 천천한 죽음을 눈을 감고 보지 않기로, 그 길을 피하기로 선택했을 것이다. 제이미와 스파이크가 마을로 무사히 돌아와 그들이 느꼈던 두렵고 불안했던 감정을 제이미가 농담과 과장된 모습으로 감추고 있는 파티 장면에서, 스파이크가 느끼는 불편함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 영화라기보다는 현재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 영화로 읽히는 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원하는 아들, “모른다”고 일관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죽음에 대한 배움, 그리고 텔레토비의 세계처럼 꾸며진 현실에 대한 의심. 스파이크는 단지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눈을 뜨기로 결심한 자이며, 조수 간만의 차에 의해 길이 드러나는 홀리 아일랜드에서, 마치 탯줄처럼 보이는 그 길을 따라 스스로 외부 세계로 나아간 인물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홀리 아일랜드는 천국을 상징할까 아니면 쫓겨난 에덴을 의미할까. 그도 아니라면, 그 곳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희망 속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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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유토피아를 믿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텔레토비에서 시작해 성공회 신부, 홀리 아일랜드의 주민들, 그리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 켄슨까지.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믿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파이크와 아일라가 섬을 떠나 의사를 찾아가는 여정 중, 한 성채에서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일라의 아버지는 진지한 줄 알았는데 이상한 사람(weird)이었다고 회상되고, 약해 보였던 아일라는 다음 장면에서 슬로우 로우의 머리를 담요로 감싸 죽인다. 이어 닥터 켄슨과의 대화에서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것에 혼란스러웠던 건 아니다”라는 그녀의 대사는, 신체적 강함이 아닌 마음의 강함,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아일라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왜일까? 나는 궁금했다. 물론 그녀는 암 진단을 받았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오히려 스파이크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는 말한다. “누군가 스파이크에게 말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일라는 유토피아 마을에서 ‘죽음’이라는 오점이 되었고, 그렇기에 숨겨지고 감춰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마을에는 사람을 고칠 의사가 없었다. 텔레토비의 세상 속 단 하나의 흠결, 아니, 오히려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많은 진실들. 그리고 아들이 엄마를 잃고, 혹은 떠나보내고, 밖에 남기로 결심한 것 또한 “돌아갈 준비가 되면 돌아오겠다”는 말처럼, 그의 선택이었으며 진실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아일라의 작은 흔적을 섬에 다시 남겨, 그녀가 죽음이 아닌 존재로 기억되도록 한다. 스파이크는 탯줄을 따라 세상에 나왔고, 다시 스스로 탄생했으며,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마주한다. 이러한 그를 단지 ‘자아의 성장’이라는 틀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오히려 눈을 감은 자들과 눈을 뜨려는 자들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눈을 가리고 “모든 것은 괜찮을 거야”, “나쁜 건 바깥에 있어”, “우리가 그것을 피한다면 모두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질문을 발견한 사람, “모른다”는 말에서 의심을 품은 사람.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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