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Bring Her Back (2025)

소리로 가득 찬 공간과 감각의 잠김

by Moon

주의: 이 글에는 영화 《Bring Her Back》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지 않기 위해 귀를 닫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기 위해 귀를 열어 둔다. 《Bring Her Back》은 바로 그 역설의 리듬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의 감각은, 욕실 타일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샤워기 물소리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소리, 그리고 거대한 음악 소리에 의해 완전히 덮인다. 이 영화에서 ‘소리’는 단순한 청각적 배경이 아니라, 잔혹하고 육체적인 감각의 포화 상태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자, 감정을 억누르는 침묵의 다른 이름이다. 소리는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덮는다. 그리고 그 덮음은 보지 않음의 윤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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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의식을 다룬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오프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곧 이복 남매 파이퍼(소라 웡)와 앤디(빌리 배럿)의 관계를 소개한다. 시각 장애를 지닌 소녀와 그녀를 보호하는 이복 오빠 사이의 관계는 처음엔 특별할 것 없어 보인다. 앤디는 파이퍼에게 현실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대신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려 한다. 파이퍼의 친구들도 그를 따르고, 두 사람의 가정은 겉보기에 평온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화면 전환과 함께 분위기는 급변한다. 샤워실 안으로 퍼지는 물안개와 그보다 더 강렬하게 울려오는 샤워기 물소리—마치 빗소리처럼 공간을 뒤덮는 그 소리 속에서, 모든 감각이 혼재하며 한 점으로 응축된다. 앤디와 파이퍼는 샤워실 안에서 피와 토사물에 뒤덮인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다. 누워 있는 그 형체는 동시에 아버지이기도 하고, 괴물이기도 하다. 파이퍼는 그 몸을 손끝으로 더듬고, 앤디는 그것을 바라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파이퍼가 혼자 보호 시설로 보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앤디는 아동 보호 서비스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그는 파이퍼의 법적 보호자로 인정받기까지의 3개월을, 그녀와 함께 낯선 임시 보호 가정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의 보호자 로라(사프론 호킨스)는 한때 상담사였지만, 지금은 딸을 잃고 감각에 균열이 생긴 인물이다. 로라의 집에는 로라의 조카라고 소개되는 말이 없는 소년, 올리버(조나 렌 필립스)가 함께 살고 있으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로라와 앤디의 관계가 점점 진동을 더해간다. 로라는 앤디와 파이퍼 사이를 서서히 이간질하고, 그녀의 애정은 노골적으로 파이퍼에게만 쏠린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통해 관객은 로라가 죽은 딸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올리버를 의식의 매개체로 삼아 괴물처럼 길들이고, 파이퍼를 희생시키려는 기이한 의식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VHS 테이프를 통해 알게 되는 정보를 통해 시체를 삼키고, 다시 토해내며 영혼을 옮기는 그 끔찍한 의식이 있으며, 이를 위해 로라는 냉동 상태로 보관해 둔 캐시의 시신을 자물쇠가 채워진 창고에 숨겨두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의식은 단순한 오컬트적 장치가 아니다. 영화 초반, "이건 컬트가 아니다"라는 선언처럼, 반복되고 과장된 의식의 행위들은 감정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려는 절박한 시도로 작동한다. 인물들은 상실을 되돌리기 위해 반복을 수행하지만, 그 반복은 결코 원상복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의 왜곡과 현실의 불확실성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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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와의 첫 만남은 강렬하다. 로라가 틀어놓은 거대한 음악 소리는 집안을 샤워실 물소리처럼 가득 채운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음악 속으로 흩어지고, 말보다 큰 소리로 가득 찬 공간은 점차 인물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윽고 그들은 '감각이 사라지는 의식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로라에게 앤디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진 속에서 로라의 몸에 의해 가려지고, 영화 공간 안에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호한 방으로 밀려난다. 이 집은 들을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소리로 덮인 상태에서 작동한다. 소음은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연출이다. 감정을 무너뜨리기보다는 눌러두는 방식,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듣지 않으려는 방식. 감각은 억제되지 않고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 넘침이야말로,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의 본질이다. 앤디와 로라는 보는 자지만, 그와 함께 가리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가 운동을 하며 틀어놓는 음악 소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몰아내려는 적극적 무시의 제스처다. 앤디와 로라는 거짓말을 하고, 현실을 밀쳐내며, 공간 속에 음악을 채워 넣는다. 앤디의 운동이라는 반복 행위와 과도한 음량은, 그가 밀쳐내고자 하는 감각과 맞물린다. 여기서 운동의 행위는 그가 견디지 못하는 감각을 몰아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처럼 작동한다. 로라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과거를 침묵시키기 위해 집 안에 커다란 소리로 음악을 틀어두고, 그 음악은 집 전체를 채우며 일상적인 소리를 몰아낸다. 그와 반대로 그들의 침묵은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이 무너질 것임을 알기에 선택된 침묵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을 향해 가면서 그들의 선택은 정반대를 향해 달려간다. 앤디는 파이퍼를 지키고자 현실을 "바라보려" 하고, 아동보호 서비스의 웬디의 "시선"을 통해 자신들을 구하고자 하지만, 로라는 파이퍼를 냄새로 속이고, 차로 치어 얼굴이 으깨질 정도의 잔혹한 이미지로 웬디를 그녀를 소거한 뒤, 앤디를 침묵의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러한 앤디의 죽음은 아마도 그가 가장 먼저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 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시체를 보았으며 올리버의 실체를 본다. 그는 웬디라는 사회복지사를 설득해 집으로 불러들이고, 파이퍼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어른의 눈을 빌리려 애쓴다. 그러나 죽음은 말이 없고, 젖은 몸은 증언할 수 없으며, 파이퍼는 자신을 믿어주던 유일한 사람을 그렇게 잃는다. 이를 통해 그는 몸을 잃었고 파이퍼의 감각 속에서 그는 그의 이를 덮고 있던 치아교정기를 통해서 감각될 뿐이다.


《Bring Her Back》은 압도적인 소리의 영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말이 없고, 의미가 없다. 그저 감각을 덮고, 정서적 충격을 연기하게 할 뿐이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사운드 디자인으로 구축된 압도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든 강렬함 속에서 파이퍼와 올리버의 존재는 구조물의 파편들로만 위치된다는 것이 아쉬운 지점이라고도 생각된다. 왜 파이퍼는 자신의 얼굴을 한밤중에 가격한 이가 앤디의 소행이라고 조작한 로라의 말에 흔들렸는가. 왜 로라가 앤디와 파이퍼의 아버지가 앤디를 폭행했다고 폭로한 순간, 앤디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믿게 되었는가. 단지 남겨진 ‘향기’가 같았기 때문일까. 이 또한 소리의 감각처럼, "진실을 말하는 시각"을 가린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때때로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능력’을 강화시켰던 걸까. 파이퍼는 모든 이의 완전한 가족이라는 투사 대상이 되지만, 그녀 스스로는 끝내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자신의 마지막 "엄마"를 외치는 일이었다. 소음들을 통해 세상이 가려진 아이. 그 점에서 그녀는 주변에서 가장 철저하게 이용당한 인물이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는 존재다.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왜 납치되었고,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기능으로 존재하며, 의식이 끝났을 때야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다. 마지막, 스스로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에서야 그는 자신으로 돌아간다. 《Bring Her Back》은 귀환이라는 말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누구의 귀환인가? 누구를 위한 귀환인가? 그리고, 소음이 떠난 자리에 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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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덮는 이 훌륭한 연출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보지 않음’을 너무 단조롭게 의미화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파이퍼나 올리버를 매개체로 중심에 놓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가려지고, 중심을 말하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모든 소리가 덮이는 구조 속에서, 로라는 ‘감각을 덮고자 하는’ 존재로 위치되지만 그녀의 소리가 영화 내내 울려 퍼지고, 파이퍼의 세상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파이퍼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영화는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시각장애라는 사실을 이야기의 감각적 구조의 해석의 도구로만 쓰고 지나간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평면성이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감각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여는 대신, 그것을 의식의 도구로 쓰고, 결국 구원의 대상 혹은 엄마를 불러냄으로써 살려지는 존재로 환원해 버린다. 가장 조용한 위치에 파이퍼가 있다면, 영화의 모든 과정 속에서 가장 많은 소리와 감각을 배출하는 것은 올리버다. 그는 소리 없이 돌아다니며 가장 큰 소리의 찢어짐을 구축시키는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그를 끝내 가장 적게 들리는 존재로 남겨놓는다. 가장 많은 것을 보았던 자이며, 가장 많은 소리를 냈던 자였던 그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사라진다. 가장 감각적인 가능성을 지닌 인물들이, 가장 기능적으로 소비되고 마는 구조. 물방울이 피부에 닿는 미세한 순간, 발끝에 전해지는 음악의 떨림, 손끝으로 만져지는 표면의 온도 차와 같은 감각의 지도는, 서사 속에서 충분히 구축되지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그들을 종종 ‘무력한 희생자’의 위치로 되돌려놓는다.


이 아쉬움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남는다. 로라는 말한다. 딸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고. 그러나 그녀가 되살리려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형상이다. 시력을 잃었던 딸을 위해, 또다시 시력을 잃은 소녀를 데려오고, 그 눈 속에 존재하지 않는 ‘유사함’을 본다. 의식은 ‘비슷함’을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도구화하는 행위다. 그녀의 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로 가득 차 있고, 그 소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지워진다. 그녀는 끝까지 듣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마지막 순간, 파이퍼가 “엄마”라고 부르자 그녀는 멈춘다. 이미 두 사람을 죽였고, 모든 계획이 실행된 그 순간. 그 호명 하나가 그녀를 무너뜨린다.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소음의 멈춤. 무엇이 그를 멈추게 했는가. 이미 두 사람을 죽인 이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이가, 왜 이 한마디에 자신의 손을 거둔 것인가. 그것은 단지 딸과 같은 외형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엄마’라는 소음 속의 고요 속에서 잊고 있던 존재의 온기를 잠시나마 되찾았기 때문일까. 설명되지 않는 이 멈춤은 영화의 균열이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조용한 구원에 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비행기의 모습과 소리는 영화의 끝에서 다시 들려온다. 앤디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파이퍼에게 속삭였던 말—“We’re not burned or buried, we just catch a flight(우리는 불에 태워지거나 땅에 묻히는 게 아니야. 그냥 비행기를 타는 거야).” 그 말은 떠남을 설명하는 방식이자, 남겨진 이들을 위한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나 그 하늘은 도착지가 아니라, 어딘가를 떠나는 길목처럼 보인다. 올리버는 마지막 순간, 경찰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코너 버드(Connor Bird). 오랫동안 타인의 의식 속에서 침묵과 폭력의 도구로 존재했던 아이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를 호명하는 순간이다. 납치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존재를 회복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름을 누구의 입에서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말은 흘러나왔지만, 응답은 닿지 못한 채 공중에 맴돌고, 슬픔은 말해졌지만,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다. 파이퍼는 살아남았지만,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앤디의 부재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의 진동 속에서 그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관객은 알게 된다. 떠난 자는 비행기를 탔고, 남은 자는 그 소리를 듣는다. 귀환은 없고, 회복은 오지 않으며,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채 잠긴다. 마치 시야 바깥에서만 정직해지는 인간들의 모습처럼. 시선을 피할 때에만 드러나는 진심, 얼굴이 가려졌을 때에야 발화되는 사랑, 목소리가 닿지 않는 순간에만 떠오르는 이름. 그리고 끝내,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아이의 이름이 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그때서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귀환이라는 말은, 결국 누군가의 말 걸림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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