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삼키려 한 자, 신화를 소진시킨 자
영화는 원숭이 가면을 쓴 남자의 링 안에서의 결투로 시작한다. 그는 몽키 맨이라 불리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로 등장한다. 원숭이의 얼굴을 한 자, 혹은 원숭이 신 하누만 그 자체가 되고자 한 자. 이는 이른바 서사의 중심이라 불리는 존재이지만, 영화가 그를 보여주는 방식은 오히려 끊임없이 흐릿한 잔상에 가깝다. 어릴 적 어머니(아디티 칼쿤테)와 함께 외딴 숲 속 마을에서 힌두 신 하누만의 전설을 들으며 살았던 그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길 속에서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천장의 틈 어딘가에 숨어, 살해당하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는 그 아이의 눈은, 처음부터 우리를 응시하지 않는다. 그는 집요하리만치 어머니가 당하는 폭력을 지켜보며, 그 눈은 범죄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집착적 시선은 그러나 반대로 그의 무력했던 과거를 드러내며, 끝내 도망친 자로서 기억의 기저에 남겨진다. 그리고 그날의 파편은, 마치 잊히기를 거부하듯 영화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소환되고 되풀이된다. 그 반복은 그를 다시 복수의 중심으로 불러올리는 듯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장면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그 기억은 점점 낯설어지고, 감정은 묽어지며, 분노는 더 이상 그를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기계처럼 작동하는 형식적 관성에 가까워진다.
이렇듯 《몽키맨》은 이상할 정도로 반복에 집착한다. 어릴 적 불타는 마을, 죽어가는 어머니, 유리창 너머로 도망치는 아이, 그리고 원숭이 신 하누만. 이 이미지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리고 가장 클라이맥스를 향하는 부분의 설명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영화 속에서 반복된다. "나는 이렇기에 복수하는 것이며,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 영화는 마치 그것을 우리가 믿지 않을까 봐, 아니면 영화 스스로도 그 믿음에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하지만 과거가 지속적으로 화면을 채우고, 마침내 그것을 어떤 폭력의 정당성으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힘이 복수의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영화는 어린 소년의 상실조차 지나치게 구조화하고, 반복하고, 끝내 소진시켜 버린다. 분노는 정당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반복 속에서 장면의 형식이 되는 순간, 나는 그가 정말 무엇을 잃었는지를 잊게 된다. 그것이 언제부터 신화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신화가 설명이 되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성인이 된 그는 ‘타이거스 템플’이라는 지하 격투장에서 원숭이 가면을 쓰고 주먹을 휘두른다. 그는 처음 시작부터 돈이 필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싸움은 생존이었고, 동시에 무언가를 향한 반복이었다. 그의 고통은 과거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고, 영화는 고의적으로 그 과거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고, 그 무언가는 고급 클럽 ‘킹스’에 도달하면서 점차 형상을 갖춰간다. 클럽 매니저 퀸이(아슈위니 칼세카르)의 지갑을 훔쳐 접근한 그는 주방 보조로 위장해 취업하고, 알폰소(피토바시)의 욕심을 타고 들어가 조직 내부를 배우고자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복수의 대상인 라나 싱(시칸다르 케르)의 곁에서,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시타(소비타 둘리 팔라)를 만난다. 알폰소와 시타는 몽키맨에서 가장 먼저 그의 편에 선 인물들 중 하나다. 그들은 호의적으로 그를 대하고, 물론 알폰소의 경우 돈을 벌게 해 줬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와 함께할 것처럼 보인다. 알폰소는 몽키맨의 변화를 목격하는 인물이 되고, 시타는 그의 안타까운 고통을 목격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스로 서지 못한 채 기계적 장치처럼만 기능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버려짐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문제로 나타난다. 라나를 향한 복수를 실패하고 도망치다 큰 부상을 입은 그는 히즈라 커뮤니티에 의해 구해지고, 이곳에서 공동체의 수호자인 알파(비핀 샤르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알파는 몽키 맨에게 계속해서 말한다. “너는 선택된 자이기에 그런 심각한 부상에서 살아남았고, 너는 선택된 자이기에 이 독약을 먹고도 오히려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너는 선택된 자이기에 공동체에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을 위해 소환되고, 그 장면과 함께 사라진다. 그들은 살아 있지 않고, 등장하고 버려지며, 그 어떤 감정도 우리에게 유예하지 않는다. 알폰소는 무거워지는 영화를 잠시나마 가볍게 만드는 요소로, 시타는 성적 매력을 가져오는 요소로, 알파는 신화적 결합을 가져오는 요소로, 북을 치던 남자(자키르 후세인)는 리듬을 위한 요소로, 모든 것들은 주인공의 마지막 복수조차 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주인공마저도, 그의 고통마저도, 그의 슬픔마저도, 단지 영화를 위한 요소로 남는다.
가장 생생했던 순간은 클럽 ‘킹스’에 들어가기 위해 위장 취업을 준비하던 몽타주였다. 과거 화염 속 고통의 순간들과 레스토랑 내부의 불길 사이의 속도감 있는 전환, 이미지들이 제각기 서로를 미끄러지듯 밀어내며 리듬을 만든다. 마치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로 영화가 말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조차 반복된다. 지갑을 훔치던 장면, 총을 구하기 위해 어딘가로 숨어들던 장면, 복수에 실패한 뒤 도망치는 장면.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같은 리듬, 같은 감정, 같은 실패를 서로 다른 스타일을 입힌 채 반복하고 있다.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같은 장면들. 그래서 그 장면이 다섯 번 반복되면, 처음에 느꼈던 어떤 가능성은 끝내 사라진다. 복수극이란 결국 욕망의 연쇄이지만, 이 영화에서 복수는 그렇게까지 끌고 가야 할 당위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라나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치고, 총을 맞고, 물에 빠지고, 구조되고, 재탄생한다. 이 흐름 속에서 그의 과거는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이야기는 길고 느리게,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어 결정적인 정점이 아니라 지연된 신화처럼 읽힌다. 그리고 주인공의 기억의 반복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죽고 한누만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마비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는 점이 이 영화의 역설이다. 그리고 마지막, 복수를 위해 클럽에 다시 침입하는 디왈리 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호원의 목에 칼을 꽂고, 그것을 이로 물어 비튼다. 아마도 한누만의 현체로의 상징적 장면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장면은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도대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을 향해 뻗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스로 하누만이 되고자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선사하는 바바 샥티(마카란드 데쉬판데)와 무엇이 다른가? 바바 샥티와의 결투는 해방감의 정점이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엔 감정이 없었다. 어머니의 이름도, 기억도, 피의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리듬을 들었다. 누군가 북을 쳤고, 주먹이 리듬을 따라 나아갔고, 마치 그것이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영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리듬은 그를 움직이게 했지만, 나는 그 앞에서 멈춰버렸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났을 때, 오히려 그를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로 복수했는가? 아니면 복수라는 구조 안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나간 어떤 존재였는가? 그의 마지막 주먹은 분노였는가, 신화의 성취였는가, 아니면 끝내 설명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였는가? 나는 그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히즈라 공동체의 공간이 인간과 신의 합치를 은유하고자 한 트랜스젠더 공동체였는지, 혹은 영화의 또 다른 잠복된 반복의 무대였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만난 인물들은 왜 모두 사라졌고, 그들과의 관계는 왜 하나도 지속되지 않았는가? 복수극이라면, 이 복수는 왜 이렇게 늦게 시작되었고, 왜 이렇게 무겁지 않은가? 왜 이토록 많은 설명과 반복을 거쳐 도달한 결말이, 그토록 가볍게 느껴졌을까? 《몽키맨》은 한 인물의 기억과 고통, 분노와 신화적 정체성을 복수의 형식으로 그려내려 했지만, 그 시도가 지나치게 구조적이어서 오히려 감정을 놓치고 만다. 반복과 설명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신화적 구조에 안착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이며, 이는 오히려 감정의 리듬을 끊어버린다. 나는 그가 복수를 끝냈다는 사실보다, 그 복수를 위해 왜 많은 인물들이 버려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더 오래 생각할 것이다. 복수의 이유가 흐릿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는 분노, 알 수 없는 폭력, 이해할 수 없지만 감각적으로 압도하는 그 무엇. 빨간 약을 먹고 무언가 깨어나는 순간에 모든 것이 터졌다면, 어쩌면 나는 이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사라진 얼굴들만이 떠오른다. 한 장면을 위해 소환되었다가, 그 장면과 함께 지워져 버린 얼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