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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Jul 18. 2020

응답하라 케빈.

관계를 읽는 시간.

그림출처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자식은 큐피드도, 로빈훗도 아니었어요. 악마죠.
바운더리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대상과의 경계이자 통로'를 말한다.-63p

우리가 상처 받기 쉽다는 말은 거꾸로 우리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존재라는 말과 같다-34p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있었고, 넌 항상 어린아이 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엄마가 딸에게.

그림출처

내 이름은 에바 캐차도리언입니다. 에바.라고 해주세요. 

아 물론 당신들에게는 잊고 싶은 그 난리법석의 주인공인, 케빈의 엄마 정도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내 이름이 에바 캐차도리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에바 일 때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붉은 토마토가 짓이겨진 그 축제의 현장에 있는 것도. 남편과의 뜨거운 만남을 이어가는 것도. 내일이 끝인 것처럼 살고 싶은 것도. 에바. 였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을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나의 화려했던 삶도. 내 자궁에서 야금야금 자란 작은 악마. 때문에 다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요. 그게 바로 케빈이에요.  


케빈은 나를 싫어했어요. 마치 내가 케빈을 싫어했던 것만큼요.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아이들은 인지발달이 덜 되었을 뿐 결코 공백상태가 아니며,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충격을 적게 받는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나 조절력이 약하기 때문에 트라우마에 더욱 취약하다. (중략) 그렇다면 유년기 트라우마의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반복적인 애착 손상이다. -108p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애착 손상을 받으면서도 그 대상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도망칠 수도, 계속 밀쳐낼 수도, 마냥 미워하지도 못할 대상 앞에서 아이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애정을 갈구한다. 이러한 혼란 상황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면 결국 아이는 꼭 필요한 지원 외에는 심리적 애착 욕구를 포기하거나, 어떻게든 돌봄을 받기 위해 관계에 매달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에 이른다. -113p 

난 한참 세상 살았는 줄만 알았는데 아직 열다섯이고. 난 항상 예쁜 딸로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미운털이 박혔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알고픈 일들 정말 많지만. 엄만 또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내 마음의 문을 더 굳게 닫지.-엄마가 딸에게.

그림출처

케빈이 싫었어요.

아이가 생긴 다는 건. 나 같은 여행 작가에겐 사형선고였으니까요. 임신한 여자들의 부른 배를 보는 것도. 그리고 나 자신이 그렇게 되어 가는 것도. 내 안의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도. 쳐지는 몸도 마음도. 다 싫었어요. 정말 다 싫었어요. 


케빈이 울 때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내가 아닌 케빈이 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죠. 난 그 아이를 돌봐야 해서 울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난 공사하는 곳을 골라 다녔어요. 유모차에 미친 듯이 울고 있는 케빈을 태운 채로요. 공사장 소음만이 케빈의 울음소리를 감춰줄 수 있었으니까요. 케빈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행복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난 그 마음을 케빈에게 말로 전해주었죠. 사실이었으니까요. 


마치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녀석임이 사실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청력에 문제가 있나 싶어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죠. 난 혹시라도 케빈이 자폐증인지 걱정도 했다고요!!


하지만 케빈은 아빠에겐 잘했어요. 나한테만 그랬어요. 그래요. 그 아이는 나를 미워했던 거예요. 아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이게 과연 모성애만으로 설명되는 상황일까요.  


신이 된 기분이었을까요. 아니면 나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주 양육자가 엄마라면 아이는 일찌감치 엄마가 없어도 상관없는 양 혼자 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렇게 된 것이 꼭 양육자 탓만은 아니다. 과분화 유형의 아이들은 고집스럽고, 공격적이고, 자율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 이들의 주된 감정은 분노다. 이들은 아직 어린아이여도 양육자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좀 더 공격성이 높다면 분노 폭발을 동반하기도 한다. 엄마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리는 정도가 아니라 엄마를 이기려고 하거나 상처 주려고 애쓴다. 이러한 관계 맺기 방식은 그대로 고착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냉담 또는 대결로 인간관계를 맺는다.-115P 

왜 엄만 내 마음도 모른 채 매일 똑같은 잔소리로 또 자꾸만 보채. 난 지금 차가운 새장 속에 갇혀 살아갈 새처럼 답답해. 원망하려는 말만 계속해. 제발 나를 내버려 두라고 왜 애처럼 보냐고 내 얘길 들어보라고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파. 힘들어하고 있다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난 엄마의 눈엔 그저 철없는 딸인 거냐고. -엄마가 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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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엿 먹이는 거였어요. 케빈은 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엿 먹이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어요. 


크면 좀 더 나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 녀석은 그렇지 않았죠. 

자위를 하다 들켜도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분명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도 고기 한 덩어리를 통째로 씹어먹으며 나를 화나게 했어요. 컴퓨터도 덕분에 완전 '뻑'이 나 버렸죠.. 셀리아가 태어나면서. 그런 일은 점점 더 심해졌어요. 나는 두려웠어요. 케빈 때문에 셀리아가 어떻게 될까 봐 더더욱이요.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죠. 셀리아는 눈을 잃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죠. 케빈. 그놈은 결국 마지막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뺏기에 이르렀어요. 남편, 셀리아, 내 일터, 집.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요. 


체육관 문을 걸어 잠그고. 남편이 선물했던 가장 성능 좋은 활로.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나쁘고 혐오스러운 것이 다른 이들이 만들어낸 가장 빛나는 것들을. 그것도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생명체들을  명중시켰어요. 그리고 추락으로 인도했지요. 


케빈. 겁을 먹은 거니. 아니면 너 조차도 알 수 없었던 거니.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바운더리는 물건의 소유관계를 확인하듯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 생각이거나, 내 욕구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에게 가진 욕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다.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자아의 '바운더리'는 자신의 심리적 형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64p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내적 상태를 반영해서 바깥으로 표현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내적 상태와 외적 표현이 크게 어긋난다.-67p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주겠니. -엄마가 딸에게.

그림출처

내가 토마토 축제 이야기를 했던가요. 나는 그 토마토가 터져서 내는 그 향기도. 그 강렬한 붉은색도. 좋아했어요. 아. 이 강렬함에 파묻혀 사는 게 행복이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내 집을 뒤덮은 페인트도, 그 날의 사건도. 애석하게 같은 색이에요. 빨간색. 미치도록 강렬한 바로 그 색이요. 막상 그 색에 파묻혀 살아보니. 이젠 지긋지긋해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아요.


그런 끔찍한 강렬함을 선물한 케빈 덕분에. 내 삶은 이렇게 망가졌어요.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케빈이 그런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요. 그래서 매번 케빈을 찾아갔죠. 하지만 케빈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당신과 내가 이깟 좁은 상담실에 앉아서 구시렁거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결국 케빈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소년을 벗어나 어른이 되었고. 그렇게 성인들이 가는 교도소로 가게 되었으니까 내 속만 계속 타들어가는 거죠.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감정이었을까요. 나는 아직도 케빈의 마지막 말이 뇌리를 스쳐요.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아는 줄 알았지만. 알지 못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바로 그 순간에. 케빈은 기죽고 겁먹은 것처럼 내 눈에 보인 것일까요.


다른 가정처럼. 우리는 이런 사진 한 장 조차 허락되지 않았죠.
감정으로 얽힌 인간관계는 곧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이 매듭은 결국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삶의 문제'를 상징한다. 어떤 관계든 시기를 놓치면 풀려고 할수록 더욱 꼬여버려 결국 잘라버지리 않으면 안 될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잘라내는 데 따르는 고통을 그냥 참고 견디는 고통을 훨씬 능가할 것처럼 느껴진다. 악연이 이어지는 이유다-49P 

바운더리에 문제가 있어 자신을 돌보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왔다는 것을 의식했다면 이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엑셀러레이터 위에 있는 발을 내려놓아야 한다. 더 큰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말이다 -272P 

그 무엇을 해내든 언제나 난 엄마의 딸로 다 버텨내고 살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요. 말하지 않아도 난 알고 있다고. 엄만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단 걸. 그래서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엄마처럼 좋은 엄마 되는 게 내 꿈이란 거.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바로 내 꿈이란 거.  -엄마가 딸에게.

그림출처

케빈과의 사이가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내가 아픈 케빈에게 책을 읽어줬던 그때요. 케빈은 처음으로 내게 안겼고. 아빠보다는 엄마인 내 품에서 나의 음성을 들으려 했죠. 그 저항 없이 내게 안기던 모습도. 바닥에 토해서 미안하다고 하던 풀 죽은 모습도. 따스한 우리 둘 사이의 공기도. 내게 그런 희망을 갖게 하기 충분했어요. 하지만 그 짧은 평화가 끝이었죠.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늘 생각하게 돼요.

케빈을 갖게 된 그때. 이 아이를 없애야 했을까요? 왜 케빈과 나 사이에는 그런 평화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지금의 나는.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 알고 싶어요. 언제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케빈의 마음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내가 잘못한 것일까요?? 




참고자료

책 [관계를 읽는 시간]

영화 [케빈에 대하여]<<제발 꼭 봐주세오

노래 [엄마가 딸에게]


추신. 

이 영화에 대한 큰 Debates가 두 개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리고 제 입장은 

1. 에바의 잘못이 크다. 

2. 모성애는 후천적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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