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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Aug 02. 2020

너의 죄를 사할 수 있을까?

감정은 패턴이다.

그림출처

영화 [어톤먼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첨부된 GIF 이미지는 일부 화면에서는 지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브라이오니. 상상력으로 무장한 아이.
사랑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다. 사랑은 심장 박동의 에너지 속에, 산맥의 웅장함 속에, 조그만 이슬방울 속에, 그리고 은하수의 광활함 속에도 깃들어 있다.-343p

우리는 이런 감정들과 공존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살아있는 동안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감정을 마주하기보다 외면하고 싶어 한다. -7p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가시나무

그림출처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 어린 브라이오니의 눈에도 그 세 가지는 명확하게 보였다. 특히 사랑이 그러했다. 자신의 언니인 씨(세실리아)와 로빈의 사랑이. 그 둘의 사랑이, 감정이 깊어서 더더욱.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아들인 로빈에게서, 브라이오니는 그의 신분, 혹은 가난을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숨길 수 없는 그것이 로빈의 한계이자 족쇄라는 것을. 사랑하는 세실리아의 관계에서 더욱.


정작 브라이오니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애정과 로빈에 대한 마음. 전자는 아직 미숙했지만, 후자는 내심 로빈이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아니 받아줄 리 없는 로빈이 야속하고 미웠다. 그래서 브라이오니는 로빈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그리고 절대 피할 수 없는 로빈의 그 약점을 앞세워 로빈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기로 했다.


이 밤이. 이토록 로빈에겐 비참했다. 자신의 신분만큼이나.
배는 주변의 물이 아니라 배 안으로 스며드는 물 때문에 가라앉는다. 당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안으로 들어와 마음을 짓누르지 않도록 하라. -264p

생각의 힘은 의외로 강력하다. 생각이 만들어내는 신념은 부메랑과 같아서 우리가 던진 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온다.-267p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가시나무

그림출처

브라이오니가 알아챌 수는 있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던 그 떠다니는 감정들은, 사랑의 당사자들 사이에게도 겨우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로빈이 세실리아에게 쓴 편지로, 서재에서의 두 사람의 행동으로 모두에게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이라 하기엔 브라이오니에게 그들의 모습은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 아니. 어린 브라이오니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정당한 판단을 내렸다. 사촌을 성폭행한 것이. 자신의 언니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고 그런 행동을 한 로빈이라고. 어른들이 몇 번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네가 본 것이 맞는지 물었지만. 브라이오니는 자신과 세실리아의 로빈을 감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대답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현실은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영원히.
죄책감은 영혼의 치통이다-토미 코튼

슬픔이 그대의 마음을 깊이 도려낼수록 더 기쁨을 그 안에 품을 수 있다. 우리는 슬픔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행복의 다양한 면모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도 희망이 있다. 슬픔은 더 큰 기쁨을 경험하게 해 준다-121p

슬픔의 본성은 사람의 상실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랑의 대상이 존재할 때 기쁨으로 표현되고, 그 대상의 부재는 슬픔으로 표현된다. -118P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가시나무

그림출처

세실리아가 로빈을 잃었을 그 나이가 되어서야.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이미 집안사람들과 모든 연락을 끊고 간호사가 되었고, 로빈은 자신의 죄와 목숨을 담보한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내몰려야 했다. 브라이오니의 마음을 담은 편지에도, 세실리아는 답이 없었다.


전쟁이 세실리아와 로빈을 꾸준히 밀어냈지만 그들의 사랑은 애틋하고 확실하게 계속 커져갔다. 로빈은 자신에게 늘 미안해 하는.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세실리아가 가련하고도 사랑스러웠고. 세실리아는 자신을 늘 밀어내는 로빈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들이 꿈꾸던 작지만 확실한 미래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바닷가의 작고 아름다운 집에서.


브라이오니는 아직 그때의 어린 순간에서 단 하루도 커 있지 못했다.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환멸감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상황은 실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경험의 지혜도 준다.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게 해 준다. 슬픔은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며, 아는 것은 힘이다.-116p

당신이 꾸준히 사과하고 보상하려 노력하면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 반성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책감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러면 안에서 곪아 가던 상처가 멈추고 스스로에게 떳떳해질 수 있다. 둘째 당신이 상처를 준 사람들의 치유를 앞당긴다. 양면적 힐링 효과다. 당신이 사과나 보상을 하려 할 때 상대방이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 제안을 받아주기나 할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사과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서서 성의껏 사과하라.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도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괜찮다. -170p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가시나무

그림출처

브라이오니는 계속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빈이 아닌, 실제로 성폭행을 저지른 폴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비록 아무 말도 할 수는 없었지만. 브라이오니는 최소한 폴을 한 번쯤은 돌아보게 만들 수 있었다. 작고 여리지만, 떨리는 용기로 가득한 발걸음은 브라이오니를 어느새 세실리아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냉담한 표정의 세실리아는 그녀가 겨우 낸 용기마저도 삼켜버릴 만큼 응집되고 절제된 분노로 그녀를 대했다. 세실리아와 함께 있던 로빈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흘렀던 세월만큼. 무뎌지거나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외면 해려 했던 사실을 다시 한번 맞닥뜨린 순간은 브라이오니가 눈감고 부정한 시간만큼 날 서고 예리한 칼이 되어 있었다. 브라이오니는 그런 로빈의 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막을 마음도, 힘도 없었다. 로빈이 브라이오니의 목숨을 끊을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할 때. 세실리아가 그를 막아섰다. 브라이오니는 로빈이 제안한 모든 것을 받아내기로 다짐했다.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증명서를 쓰고. 가족의 사인을 받아 그 둘에게 가져오기로. 지금 당장. 고향으로 내려가서 로빈과 세실리아의 족쇄를 자신이 반드시 끊어주기로.


자신의 소설 속에서라도. 브라이오니는 그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잘못을 저지른 다음 교훈을 얻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이다. -167p

다행히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사건이 있은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사과할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상처 입힌 사람을 알게 되었고 자기 잘못을 후회한다는 사실이다.-169p

죄책감마다 고유한 사정과 어려움이 있지만, 제대로 인식하기만 하면, 각각 우리를 최선의 자아로 이끌어 줄 것이다. -180p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가시나무

그림출처 1  그림출처 2

수십 년이 걸렸다. 브라이오니가 고향에 내려가기 까지. 그리고 브라이오니가 모든 진실을 담은 증명서 같은 소설, Atonement를 탈고하기 까지. 자신이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머릿속에서 크고 작은, 하지만 끊임없는 뇌졸중이 일어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브라이오니는 그 병이 자신을 보기 좋게 쓰러뜨리기 전에 그 소설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자신의 마음을 드디어 비워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다.

세실리아와 로빈은 둘 만의 밀회를 즐긴 적도. 브라이오니와 셋이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전투 중반에 젊고 아름다운 생을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마감해야 했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죽음의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올리면서. 단지 죄책감에 겹겹이 둘러 싸인 브라이오니가 소설 속에서라도 자신의 죄를 덜어내기 위한 장치를 썼을 뿐이었다.


브라이오니는 결국 그 어떤 잘못도 빌지 못한 채 평생을 자신의 인생 막바지까지 그 죄를 숨긴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 아름다웠던 연인의 마지막이 독자들에게까지 끝없는 아픔을 주게 될 것 같아 브라이오니는 그들을 그들의 파라다이스에 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흰색 나무, 파란 창틀. 그리고 바닷가에 위치한 그 연인들의 짧은 휴가.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위한 그들만의 휴식. 겁 많고 두렵고, 거절당함이 마음 아팠던 어렸던 브라이오니가 줄 수 있는 가장 작은. 그리고 너무 늦은.


브라이오니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냈다.

그녀가 눈을 감는 그 순간에. 그녀가 그들을 만나러 흰색 나무에 파란 창틀을 가진 바닷가의 그 집에 다시 찾아갈 때. 그녀는 그들을 향해 아주 작은 미소라도 띌 수 있을까.


참고자료

책 [감정은 패턴이다]

영화 [어톤먼트]>>이 영화가 가진 미친 영상미 지분의 99.9%는 맥어보이 얼굴 때문임.ㅇㅇ

노래 [가시나무]<<나는 가수다에 나왔던 자우림 버전이 젤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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