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x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nalogi Dec 05. 2021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진짜 잘하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리뷰


이 글은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명 같은 하얀색 차 일뿐인데.

이상하게도 아빠의 차는 구별해낼 수 있었다.

그것이 아빠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익숙해진 덕분에 차에 남은 특징이 각인이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분명 공장에서 몇백몇천 대를 찍어낸 공산품일 뿐인데도.


개성은 그런 것인가 보다.

무기명의 그 무엇들 사이에서도 도톰하게 튀어나와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리는 우리와의 눈 맞춤.


최근 우리의 눈길을 뺏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영화들이 앞다투어 개봉했었다.

모래 속에 관객들을 가둔 [듄]을 시작으로 중세 시대에 유난히 차가웠던 겨울을 간직한 [라스트 듀얼]. 얼어붙은 마음을 추억을 닮은 파스텔톤으로 은은히 달래고 풀어준 [프렌치 디스패치]까지. 모든 감독들은 각각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신분증을 내밀며 달리는 기차의 우등칸에 떠억 하고 버티고 앉은 채. 유유히 멀어져 가는 창밖의 풍경들을 쳐다보고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에드가 라이트는 이 기차에 올라타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일까. 그는 [베이비 드라이버]의 베이비가 요란하고 시끌벅적하게 몰아대는 차를 타고 어떻게든 그 열차의 턱밑까지 찾아왔다. 아슬아슬하고 간신히 열차의 꽁무니에 매달린 그는 이제 정말로 "티켓값"을 해야 했고 그 대가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가지고 온 것만 같다.


다행히 그는 베이비의 차에서 내리면서 자신의 신분증은 챙긴 것처럼 보인다.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표시 이자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개성. 에드가 라이트입니다.라고 말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든 것을 담은.


여주인공에게서 느끼는 공감의 증폭 ;감독이 자신의 주특기를 인물에게 입히는 또 다른 방법. 


사진출처:다음 영화

엘로이즈(토마신 맥킨지)는 꿈을 위해 런던으로 왔다. 또래에 비해 많은 인프라를 누리지 못했던 배경으로 친구들에 비해 작은 세계를 가진 그녀는 늘 초라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오래되고 낡은 방 한 칸이 누릴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곳에서마저 그녀는 악몽에게 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주인공에게 이렇게 감정 이입을 한 적이 최근에 있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혹은 영국이나 미국에. 아니 내가 첫 발을 내디뎌야 했던 그 모든 낯선 곳에 도달한 나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다. 비록 영화일 뿐이긴 했지만. 주인공의 연속된 절망은 뼈 안에 잠시 잠자고 있던 근원적인 나의 아픔을 건드리며 그녀의 처지에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울어야 하는 영화가 아닌데 울 뻔함)


삶에 있어 처음 만나는 크고 작은 변화로 인해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엘로이즈 홀로 견뎌내야 하는 그 순간들을. 주인공이 철저하게 혼자 존재하는 그 순간들을 감독은 놓치지 않았다. 그 설명하기 힘들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빨리 지나쳐야만 영화가 지루해지지 않는 부분들에 감독은 적절한 음악을 심어 대체한다.


전작 [베이비 드라이버]의 경우는 음악에 영화를 맞춘듯한 영화였다. 물론 신나고 명랑했지만 영화가 음악의 속도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 작품은 그런 장면이 있어도 조금은 덜하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요소로 음악을 활용하고 있다. 덕분에 그녀의 좌절도, 슬픔도 음악에 볼모로 잡혀 끌려다니기보다는 관객의 마음에 좀 더 깊게 다가온다. 영화가 음악 때문에 기준점이나 길을 잃었다는 생각도 조금은 덜하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도 분명 아름답지만. 영화관을 나올 때면, 자신이 힘들 때 버팀목이 되었던 음악이 반드시 생각나게 된다. 각본으로 봐도, 감독의 특기로 봐도. 음악이라는 소재의 선택은 탁월했던 셈이다. 역시.라는 눈빛으로 어깨너머의 그를 쳐다보면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호러 영화인 줄 몰랐다;응애
사진출처:다음 영화 / 두 주인공 모두 매력 미쳤음.

엘로이즈와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는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고, 그 통로는 영화에서 계단으로 상징화할 수 있다. 주인공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들은 모두 그녀들이 꿈꾸고 있던, 혹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을 보여주고, 위(방)로 올라가는 것은 현실로 돌아오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부터 신발에 덕지덕지 묻어온 질척한 불행은 수많은 계단에 들러붙고도 모자라 그녀들의 옥탑방까지 따라왔다. 지저분한 얼룩이 되어 여기저기 묻은 채 말라버려 닦아내기 힘들어져버린 마룻바닥처럼. 엘로이즈와 샌디의 인생이 점점 동화되어 갈수록 그렇게 꿈꾸던 지하도, 자신의 유일한 쉼터도 지옥으로 변해간다. 어쩔 수 없는 통로인 계단을 통해 이 두 세계는 연결될 수밖에 없고, 불행과 처절함은 점점 더 축적될 뿐이다.


영화는 그녀들의 인생이 겹쳐지며 망가지는 모습을 빠르고 확실하게 그려낸다. 앞으로 빛나는 일만 남은 것 같은 샌디의 인생이 처절하게 꼬여가는 것은 엘로이즈가 미쳐가는 모습으로 대체되어 더 끔찍하게 그려진다. 영화는 속도감을 잃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그 속도 그대로 관객들을 상영시간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기분이 든다.


반전영화(인 줄 몰랐다), 혹은 탄탄한 스릴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떡밥 회수도 어느 정도 하는 편이라, 영화 속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의 대사나 소품을 곱씹거나 추측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영화에 몰입감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며,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가는 두 주인공의 인생에 안절부절하는 것은 결국 관객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다면 난 안 보러 갔을 것이다.ㅠㅠ힝구ㅠㅠ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진짜 잘하네.;칭찬을 발판으로 삼을 줄 아는 능력
사진출처:다음 영화

모든 것에 그러하듯.

우리는 기대라는 것을 한다.

기대보다 못할 때 우리는 실망을 하고 품었던 기대보다 더 나을 때 미소는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기대라는 것은 품고 있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인 경우가 많아서, 감독이 그 어떤 작품을 들고 나와도 자신의 기대와 다른 모양을 가진 경우는 품었던 기대의 크기가 독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에게든 영화에게든 기대를 (많이)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관심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기대가 쏟아지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일 때도 있지만. 모든 모양의 기대를 담는 보자기 같은 작품을 만들기란 늘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자신의 색깔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감독의 반열에 들어선 경우엔 더.


감독은 이런 천차만별의 기대를 영리하게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각본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이 들었던 찬사 위에 또 한 겹의, 하지만 다른 종류의 찬사를 올리려는 시도가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최근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경이로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이런 과감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태도는 대단하다는 말을 절로 하게 한다. 덕분에 호러 영화이지만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검은색이나 검은색을 닮은 피라던가, 잔인한 장면으로 점철되어야만 하는 호러 영화가 아닌. 감각적이면서도 충분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마치면서 

물론 치가 떨리게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약간은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했고, (공복에 영화를 보러 가서 그런지) 약간은 정신 사납거나 시끄럽다고 생각할 만한 장면들은 존재했다.


그럼에도 호러 영화에서의(?) 이런 시도들은 충분히 반가웠다. 덕분에 이 정도면 너무 괴롭지 않게 볼 수 있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장르가 생긴 것만 같아서.



[이 글의 TMI]

1. 친구로 나왔던 Year들 다 나쁜 Year들이라 걔들이 제일 먼저 죽길 바랐음(응?)

2. 혼자 귀 막고 눈 가리고 난리 법석이었음.

3. 영화 보는 중에 캐리어 끌고 들어오신 남자분이 계셨는데 그 소리 때문에 진짜 기절할 뻔함.

4. 이제 진짜 스파이더맨만 남았나.


#라스트나잇인소호 #에드가라이트 #토마신맥켄지 #안야테일러조이 #영화리뷰 #영화추천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함이라는 특별한 왕관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