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nalogi Dec 31. 2021

우리 모두 거쳐온 완벽한 세계,어린이

책 [어린이라는 세계]리뷰

아이를 키우느라 8년 만에 복직하시는 박사님과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참고 1)


저는 그런 박사님을 위한답시고 '그래도 이제 애가 다 컸으니 뿌듯하시겠어요'라고 했었습니다. 그 말에 매운 콩나물국을 들이켜시던 포닥 선생님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수저를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말씀하셨죠.


얘.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지지만 아까운 순간 역시 그 8년이야.


씁쓸하게 웃으시던 박사님도. 그리고 자신의 할 일을 잃은 수저도. 그리고 저도. 다시 식사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박사님은 그 대답 뒤로 내리 30분을 우셨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저는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어쩔 줄 몰라 하며 박사님께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지만. 실컷 울고 난 뒤라 그런지 박사님의 얼굴은 조금 개운해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2021년 2월 김영하 북클럽의 책은 [어린이라는 세계]였습니다. 저는 제목을 듣자마자 박사님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서점에서 한참이고 그 책을 한 권 더 사서 선물을 해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읽는 내내 거부감이 있으면 어쩌나.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제가 가진 이 편견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라는 이름으로 그 많은 "작은"사람들을 제가 얼마나 무시했는지도 알 수 있었던 책이죠.


엉망진창인데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세계;우리는 왜 어린이를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다양한 이 모습들 모두 아이.라는 단어로 치부되고 있었네요.

저는 주로 이 책을 물리치료를 위해 정형외과를 찾았을 때 읽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싫어하는 아이들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도 참 술술 잘 읽혔습니다. 순수하다.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아이들의 행동들이 책에서 통통 뛰어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쩜 이리도 천방지축인데 사랑스러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덕분에 물리 치료 강도는 높아져 가는데 웃고 있는 이상한 환자가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기분 좋게 장악하고 있는 아이들 만큼이나 좋았던 것은.


우리가 아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기 쉬운 이들을 하나의 '작은 사람'으로 명명하고 정성껏 대하려고 했던 작가님의 행동들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정성껏. 하지만 규칙을 세워 아이들을 대합니다. 결고 그들을 무시하려 하거나 어리다는 필터를 씌운 시선으로 작은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았죠. 그래서 책 자체는 아이들이 그 나이에 가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과 함께 아이들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한때 우리 역시 오래 살았지만. 이제 컸다는 이유로 추방(?) 당한 그 아름답고 웃음 가득했던 세계 말입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아이들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면 절대 탄생하지 못했을 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좋은 어른들이 있었기에. 아이들 역시 좋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요.




아이는 잘못이 없다. ;아이는 그럴 수 있죠. 그러나 너어는 그러면 안 돼.


잠시 그 박사님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사님은 그렇게 30분을 우시곤 제게 겨우 말씀하셨죠.


나도 알아. 그 애가 잘못한 거 아니라는 거.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자꾸 아이를 미워하게 돼. 이래서 아이한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하나 봐. 그러니까 너는 결혼하지 마라.


뭔가 결론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게 둘 다 웃으며 다시는 그런 섭섭한 말을 박사님이 입에 올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복직은 기다려온 세월에 미치지 못한 채. 6개월 만에 마감되었죠. 박사님은 그때 식당에서 우셨던 것보다 더 숨 죽고 깊은 울음을 제 앞에서 토해내셨습니다. 위의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요.


박사님의 책상 치우기는 사흘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데이터는 더 이상 박사님과 제 대화의 주제가 되지 못했죠. 인수인계를 하는 한 달 내내 저희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리고 박사님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작게는 가족의 문제이고. 크게는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는 자꾸 아이의 탓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생겨서. 아이 때문에. 아이가 있으니까. 


라는 말로 모든 잘못이 마치 이 뱃속에서 열 달을 품고 태어난 아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해버리죠.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편이 편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우리들의 비난을 나중엔 높은 확률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요.


잘못된 아이나 강아지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면. 결국 잘못한 것은 보호자들인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아직 아이들은 가르침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른들과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잘못을 그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우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게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나 역시 아이였다.;개구리 올챙이적 너무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오?
어제 드라이 마친 패딩을 입고 서리 내린 땅바닥에 파묻힌 아이를 보았을 때의 엄마의 마음을 서술하시오(10점

이 책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 하나가 있다면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모두 너무도 천사 같다는 점입니다. 말도 잘 듣고요. 아이들이라고 다 순진하게 행동하거나 순진하거나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악의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칼을 꽂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작은 사람이기도 하죠.


가장 가까운 예인 저로 먼저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 역시 지금보다도 더 미성숙한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저를 여기까지 키워주신 엄마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가관이었다고 합니다. (참고 2)


시골에서 자라 자유분방했던 저는 온 동네 개를 끌고 다니며 산책을 빙자한 동네 개 가출시키기 프로젝트의 선봉장이었고. 저희 집 벽지는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늘 사망했습니다. 찢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둘 중 하나였거든요. 그뿐인가요. 장롱 문에 매달리다가 장롱 밑에 깔려서 그 안에서 네 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괜찮았냐고요? 발견되었을 때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도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모두를 정신없게 만드는 저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수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자라온 흑 역사 가득한 그 세월을 제3자의 입을 빌려 들으면 늘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때 난 어렸잖아. 아이였잖아.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 아이들 역시. 이해해야 하는 대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소란을 피울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는 눈길보다는 아직은 사회화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배워가는 우리와 같은 사회원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치면서;짧은 추신들.
진짜 비염이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셔서.... 휴지 좀 보십쇼..

1. 그래도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저랑 비슷할게 뻔한 남편과(참고 3 ) 저랑 똑 닮았을 아들이나 딸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살 생각만 해도 벌써 지구가 엎어질 것 같지 않으신가요.. 이건 생태계에도 해로워요...


2. 박사님은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가끔 통화를 하는데. 그냥 마음이 아픕니다. 잘 되고 있지?라는 말에 네.라고 대답해도. 아니오.라고 대답해도 가슴 아파하실 것이 뻔해서요. 책은 선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이 글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3. 아이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저 진짜 어릴 때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아이들은 천사죠. 암요. 엄마가 제 어릴 적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술을 달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엄마 주량=내 주량=맥주 반잔)



참고 1

여자들은 보통 '직업으로의 롤 모델'이 잘 없는 편인데. 이 박사님은 정말 딱 내 롤 모델이셨음. 똑 부러지고 할 말하고 칭찬받으면 수줍어하거나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당당히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었음. 늘 씩씩하고 재밌으셔서 참 많이 따랐음. 말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셔서. 묵묵하게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으면 참 힘이 되는 분이셨다.


참고 2

진짜 유명했음. 감나무집 손녀 하면 다 알았음. 하도 배실 배실 잘 웃어서 유괴될 뻔했다고도 하심. 그러나 나는 태연히 그 집에 가서 밥을 두 그릇 먹으며 놀고 있었다 그랬음.유괴범(?)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다시 데려다줬다는 전설의 친화력. 엄마가 늘 그랬음. 그 난리를 부리면서 자랐는데도 경찰서나 법원 안 가줘서 고맙다고.


참고

딸은 아빠와 비슷한 사람이랑 결혼한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때가 있었음. 뭐가 어디가 비슷하기 때문일까.라고 생각해 본 결과 나의 경우는 외모+성향이었음. 여태까지의 연애를 찬찬히 뜯어보면 내가 아빠를 닮아 좋아했던 점들을 가진 사람과의 연애가 행복하고 오래갔었음.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아빠는 내게 좋은 취미와 성향과 신체조건, 경험을 물려주신 분이고. 그 덕분에 나는 나 다운 삶을 잘 살고 있기에. 아빠를 닮은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음. 고로 남편과 많이 싸울듯함. (응?)



[이 글의 TMI]

1. 읽고 서평 쓴 것은 2월임.

2. 논문 준비하는 버릇이 있어 뭐라도 쓰고 저장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음. 거기서 아이디어를 많이 건지는 편

3. 이사하고 나서 마음이 편해진 건지 자꾸 늦게 일어남. 정신 차리자.

4. 앞으로 짧게라도 일기를 써야 하나 생각 중.

5. 요새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힘듦. 나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냥 살고 있는 느낌.






매거진의 이전글 추운 마음에, 두꺼운 이불 한 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