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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Oct 23. 2020

끝내 피워 낸 한 송이의 꽃, 릴리

마음의 오류들

그림출처

이 글은 영화 [The Danish Girl]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울라에게 선물 받은 이름,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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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다수는 어릴 때부터 젠더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자라면서 사회의 다른 소년들이나 소녀들처럼 다소 전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당신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각과 행동이 객관적인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까지만 옳다. 감각은 행동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당신의 뇌에 객관적인 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당신의 뇌에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다.

여자들은 이런 것을 잘도 신는구나.

자신은 앞뒤도 구분할 수 없는 스타킹을 조심히 신으며 아이나는 생각했다. 이미 자신의 그림을 화랑 측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임신조차 실패한 부인 게르다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게다가 이젠 그림의 모델 울라까지 스케줄상 올 수 없다는 비보에 휩싸였으니,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우스꽝스러운 대역을 해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스타킹에 구두까지 신고 어색하지만 부인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의자에 앉았건만, 게르다는 치마 주름을 봐야겠다며 기어이 아이나의 품 안에 실크 치마를 한가득 안겨주었다. 자신은 절대 입지 않을 법한 옷의 묘한 감촉과 그 속에 갇힌 낯선 신체를 바라보며. 아이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 낯선 촉감에 매료되었다.   


새로 산 게르다의 잠옷에서도. 그런 촉감이 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웠다. 게르다의 굴곡진 몸에 맞춰진 잠옷을 손으로 쓰다듬는 내내 흡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나에게도 잠옷을 빌려주겠다는 부인의 말에 키득거렸지만,  문득 아이나는 내가 이 옷을 입으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부부관계에서 가끔 있는  이벤트처럼. 그런 묘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게르다의 잠옷을 잠시 빌려 입었을 뿐이라고. 아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드러운 감촉을 가진 천 쪼가리. 나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아주 잠깐 흥분하게 했던 감촉일 뿐이었다.


아이나는 릴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임을 조금씩 인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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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부터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동의 차이는 우리 뇌의 독특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활동, 자기 자신을 개성 있는 존재라고 지각하게 만드는 모든 감정과 생각은 우리 뇌에서 나온다.  당신은 아마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당신이 보고 냄새를 맡고 맛보는 복숭아가 정확히 당신이 지각하는 것과 동일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젠더 정체성은 성의 연속선상에서 자신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느낌이다. 즉 남성이다, 여성이다, 양쪽 모두 다, 아니면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하는 느낌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물학적 발달, 느낌, 행동을 포괄하는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젠더 정체성은 개인별로 크게 다를 수 있으며, 뇌의 정상적인 성적 분화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는 스타킹을 신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부부의 장난은 아이나를 릴리로 변장시켜 파티에 데뷔시키는데 이르렀다. 낯설지만 화장을 하고, 여자의 몸짓을 따라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도 킬킬거리며 웃을 수 있을 둘 사이의 장난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릴리를 '연기'하는 것일 뿐이니까. 게르다도. 그리고 아이나 자신도 그런 황당하지만 아슬아슬한 장난을 그 정도로 치부했다.  


릴리는 그저 다른 페르소나일 뿐이라고. 언제든 묻어버리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헨릭의 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게르다는 두 번 다시는 릴리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이 헨릭과 릴리로 변장한 아이나의 키스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아름다웠던 릴리 때문이었는지, 혹은 아이다가 릴리로 변장했던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나는 알고 싶었다. 자신이 연기했던 것이 릴리였는지. 아니면 아이나였는지. 혼돈에 휩싸인 불덩이 같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큰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다리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숨긴 채, 자신에게 낯선 감촉을 선사하던 실크 옷을 가득 움켜쥐었다. 분명 이질감으로 가득하던 감촉이었다. 입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어쩌면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을 가둘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을 이 옷에 가둔 채 살고 싶었다. 두 번 다시는 이 옷을 벗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듯이. 릴리는 얼굴 가득 희미한 안도의 미소를 뗬다.


이 손을 놓으면. 릴리도 아이나도. 그리고 자신도. 모두 무너질 것만 같은 게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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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빙산과 같다.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은 1/7에 불과하다-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냥 내 몸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뿐이었어요. 그냥 몹시 거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사실 그 뒤로 쭉 그랬지요.

젠더 정체성이 해부학적 성과 어긋나는 사람들, 즉 트랜스젠더는 유년기부터 자신이 잘못된 몸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며, 그 느낌은 청소년기와 성년기에 더 강해지기도 한다. 내면의 느낌과 겉모습 사이의 긴장은 혼란과 스트레스를 일으키며,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는 불안과 우울증 같은 장애를 겪고, 심각한 차별과 신체적 위협에 직면하기도 한다.

릴리, 라는 꽃을 피워내는 것은 참 어려웠다.


사랑인 줄 알았던 헨릭은 자신을 릴리가 아닌 '여장남자 아이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체성과 사랑 둘 다 상처 받아버린 릴리는 도망치듯 집으로 가는 길의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릴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창에 비친 모습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 같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두 사람에게 번갈아가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상한'사람이니 옷장문을 걸어 잠그라고 게르다에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제정신이 아닌 남편을 받아들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게르다는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은 미친 것이 아니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르다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점점 더 릴리에 가까워져 가는 자신의 남편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 그리고 조금 더 자연스럽게 아이나 보다는 릴리라고 자신의 남편을, 아니 새로운 인격체를 불러주는 것뿐이었다.


상처 받았지만 순결한 릴리를 화폭에 그려냄으로써, 아이나의 삶에 가려져있던 게르다의 예술적 재능은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열리게 될 전시회를 기폭제로, 남편을 미치광이, 혹은 성도착증 환자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릴리의 삶을 찾아주기 위해 게르다와 릴리는 파리로 떠나게 된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오열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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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사회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선이 서로 달랐다. 정신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들은 천재나 성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비정상이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잔혹한 대우를 받는 일이 더 많았다.

물론 모든 스펙트럼에는 그 사이에 놓이는 것들이 있지요. 나는 생명이 본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존재 방식이 그런 거라고요. 많은 성전환자들이 똑같이 느낄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그토록 가아 게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자기 자신의 모습에 그냥 익숙해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건 사회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전환은 긴 여행이거든요.

문득 게르다는 마치 자신이 릴리의 씨앗을 심고 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릴리는 원래 아이나의 안에 있는 것이었을 뿐. 정작 아이나가 껍질이었다는 것을 이젠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연의 실수를 바로잡고 가짜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 남은 생을 릴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 두 사람의 목표가 되었다.  


세상에서 단 한 번도 행해진 적 없는 성전환 수술이 바로 그 방법이었다. 두 번의 커다란 수술을 거쳐야 했고 그 두 번 모두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수술이었다. 게르다와 릴리를 만나게 한 접점에 있는 아이나는 사라지겠지만. 릴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보다는 그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 의지 하나로, 그녀는 첫 번째 수술에 이어 두 번째 수술도 성공적일 것을 기대하며, 수술대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어릴 적 자신을 안고 아이나가 아닌 릴리라고 불러주던 어젯밤의 꿈을 기억하면서.


이제 릴리로써의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것 외에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눈을 떴다. 오롯이 정신과 신체가 일치하는 릴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과다출혈로 시작된 알 수 없는 몸 안의 열은 결국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게르다의 지극한 간호도, 이런 이상한 형태의 부부도, 친구도 아닌 관계 속의 자신을 사랑해주는 헌신도 소용없었다. 숨이 꺼져가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릴리는 아이나로 살았던, 그리고 릴리로 변해가는 삶 속에서 게르다가 얼마나 많은 힘을 자신에게 주었는지를 깨달았다. 게르다의 따스하고 꺼지지 않는 자신을 향한 마음을 릴리는 다시 한번 깨달으며 무거워지는 눈을 굳게 감았다. 릴리는 게르다의 울음소리도, 손길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살아있는 내내 비난에 시달렸던 것처럼 바람마저 가득한 릴리의 고향은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웠지만 쓸쓸했다. 그녀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은 게르다는 그 모든 광경들을 눈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바람이 불어 하늘 위로 도망치듯 날아가는 릴리의 스카프를 보면서, 마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늘 박제되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이 그제야 해방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림 외에 릴리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었지만, 게르다는 그냥 날아가게 두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게르다는 점점 멀어지는 스카프를 보며 자신이 사랑했던 두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 아이나, 그리고 릴리.



[참고자료]

1. [마음의 오류들] Chapter 10;뇌의 성적 분화와 젠더 정체성

2. [The Danish Girl]



[이 글의 TMI]

1. 쓰고 싶은 영화가 사실 엄청 많았는데 에디 레드메인이 꿈에 나와서 막판에 바꿈.

2. 이 영상 킬포가 대체 몇 개인가.

3. E book으로 읽었는데 페이지가 나오지 않아 페이지 표시를 하지 못 했음.

4. 이 영화는 게르다의 헌신에 늘 눈물이 나는 영화임.(게다가 실화임)

5. 책의 파트가 매우 잘게 나눠져 있고 전공서적에 가까웠기 때문에 글감이 없어서 진짜 힘들었음.

6. 아직 밥 빨리 못 먹음. 약간 번 아웃 왔음.


#마음의오류들 #독서 #서평 #영화 #크로스오버 #대니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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