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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Oct 08. 2020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공감의 배신

그림출처

이 글은 영화 [무뢰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혜경은 바로 알아채 버렸다.
공감은 늘 선물과 침해 사이에 위태위태하게 걸터앉아 있다.-레슬리 제이미슨

공감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예가 너무 많다는 사실뿐.-13p  

공감은 어리석은 판단에 근거할 때가 많고, 무관심과 잔인함을 유발하기도 한다-13p

나에겐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아몬드

혜경의 앞에 섰을 때 재곤은 범죄자와 형사 사이에 구분을 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끝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범죄자 준길을 잡기 위해, 그의 연인인 혜경에게 접근하는 것. 혜경이 일하는 술집의 영업부장으로 위장해 준길의 은신처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형사인 재곤의 목적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려면 마치 스나이퍼가 그러하듯, 자신을 은폐, 엄폐해야 했다. 재곤은 혜경과 비슷한, 혹은 같은 색을 몸에 묻혔다고 자신하며, 혜경 앞에서 씩 웃었다. 하지만 혜경은 단번에 영준의 풋내를 맡아내곤 영준의 거짓 공감에 반기를 들었다.


영준은 서툴렀고 성급했다. 준길의 은신처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혜경에게 그것들은 의미 없고 성가신 정보들일 뿐이었다. 혜경에게 공감을 얻으려는 영준의 노력은 하나같이 엉성하게 돌린 나사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입간판 같기만 했다. 흔들흔들. 위태위태. 하지만 시선을 늘 잡아 끄는.


사인지 회수하려면 가오가 서야죠.

그림출처

공감은 다른 사람이 느낀다고 믿는 것을 느끼는 행위,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험하는 행위다-13p

우리는 공감 능력을 활용하지 않고도 온갖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38p

공감은 특정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다. 스포트라이트와 성질이 비슷하다 보니 공감은 간단한 산수도 못하고 근시안적이다.-49p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여러분이 정한 목표를 이루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도 구에는 도덕관념이 없다. 성공한 상담치료사와 성공한 부모들만 인지적 공감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기꾼, 성공한 제비나 꽃뱀, 성공한 고문 기술자 역시 인지적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56p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아몬드, 171p

영준은 빠르게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공감하고 마음을 얻어내야 하는 사람은 그냥 한낱 퇴물이 되어 버린 술집 마담 김혜경이 아니라는 것을. 이 바닥 생활 10년 만에 빚이 5억이고 희망이 없는 여자. 독기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은 여자. 자신의 연인인 준길 때문에 자꾸 사면초가에 처하면서도 끝까지 발톱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김혜경. 그것이 영준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선 노선을 조금은 다르게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곤은 정말로 영업부장 영준이라도 된 것처럼. 영준은, 아니 재곤은. 어쩌면 다시 영준은 김혜경의 형체만 남아버린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불쌍했으니까.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목표를 위한 것이니까. 영준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심어주는 구실로 쓰기에는 충분한 문장들이었다.


곁을 주려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것은, 같은 주파수를 띄며 점점 비슷한 울림을 갖게 되는 것은 혜경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더 예전부터 그랬는지도 몰랐다. 어렵사리 만난 준길은 혜경에게 잔뜩 포장된 말들을 풀어내며 혜경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본심은 돈을 구해달라는 단순하고 묵직한 칼일 뿐이었다.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기엔, 곁에 있는 영준의 울림은 어쩐지 비슷하고 마음이 놓이는 울림이었다. 혜경은 그 공명 안에서 남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면. 여기선 잡채도 연기하는 거 같음.

그림출처

공감은 간단한 산수도 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을 나머지 사람들보다 편애한다. -21p

물론 이성적으로 숙고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도중에 혼란에 빠질 때도 있고, 그릇된 전제에
서 출발할 때도 있고, 사리사욕으로 판단력이 흐려질 대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추론을 수행하는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툰 추론 실력에 있다.-74p

공감이 유도하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121

공감에는 스포트라이트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공감에 의존했다가 비뚤어진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124   

연민과 친절은 공감과 상관없이 따로 존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공감과 대립한다. 때로 우리는 공감에서 비롯된 감정을 억누를 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190p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아몬드, 245p

진주 귀걸이를 주지 않았어야 했을까.

아니면 동침을 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을 어떻게 끊어내야 지금 이 거지 같은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을지. 혜경의 계획을 상사에게 보고하는 재곤은 알 수 없었다. 문득 재곤은 자신이 일부러 묻힌 그때가 결국은 자신의 냄새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어버린 이 공명을 끊어내려면 영준이 아닌 재곤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자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혜경의 모습을 보며.영준은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혜경은 믿고 싶었다.

자신에게 같이 떠나 살자고 말하는 영준의 그 마음을.

그러나 끝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서운한 마음까지 잔뜩 묻은 잡채를 입 안 한 가득 밀어 넣으며 쓸쓸함을 꾹 달래는 것뿐이었다.


영준만 잃었으면 그나마 덜 비참했을 것만 같았건만. 혜경은 재곤의 함정 수사에 빠져 결국 준길마저 잃게 된다. 올해 도망갈 곳이 없는 운세라는 마담 언니의 말이, 혜경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혜경의 마음을 각각 다르게 울렸던 두 사람의 상실을 더더욱 뼈저리게 깨닫게 했다. 죽지 못해 사는 삶. 혜경은 자신에게 남은 삶의 모습을 불현듯 본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그 대답을 들으면 후련해지기는 할까.

그림출처

이타주의자를 할퀴어 상처를 내라. 그러면 위선자의 피를 보게 될 것이다-마이클 기 셀 린

공감과 달리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민의 특징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한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연민은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다.-186p

혹시 여러분이 악에 대해서, 그러니까 진짜 악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면 더 나은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한 짓을 생각하지 마라. 대신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혔던 행동, 그래서 그들이 여러분에게 사과와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행동에 대해 생각하라.-240p  

엄마는 모든 게 나를 위해서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아몬드, 40p

혜경은 화려함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감정도 얼굴에서 지워내야 했다. 마약사범의 수발을 들며. 마치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비참한. 혹은 그보다 더한 삶을 사는 것으로 혜경은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이젠 그나마 희망이었던 준길도 없었고, 가루가 되어버린 자존심을 반죽해줄 영준도 없었다. 오롯이 혼자였고 오롯이 외로워야만 했다.


그런 혜경의 앞에, 뻔뻔하게도 영준은 재곤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어쩌면 재곤이 영준의 모습으로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취조실에서 냉정하게 이름과 주소를 묻던, 준길과의 관계를 묻던 그 차가운 눈빛을 가진 생명체의 모습으로. 낯선 모습과 익숙한 색깔이 뒤섞인 모습으로. 그는 혜경을 찾아왔다.


자신의 일을 한 것일 뿐. 그녀를 배신한 것은 아니라는 재곤의 말은 혜경의 마음에 남아있는 마지막 용기를 끌어내게 했다. 그녀는 영준을 죽였다. 아니. 재곤이었을까. 자신이 죽이고 싶었던 사람은 그 둘 중 누구였을까.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왜 자신에게 본명을 알려주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물어봤다면. 그리고 답을 들었다면. 혜경은 속이 후련했을까. 이젠 미워할 사람조차 없어진 자신의 삶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혜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이 저지른 광경을 보며 울부짖는 것 뿐이었다. 자신을 동정했을 뿐인 그 누군가의 핏빛 죽음을 보면서.




[참고자료]

1. [공감의 배신]

2. [아몬드]

3. [무뢰한]


[이 글의 TMI]

1. [무뢰한]과 [불한당] [He loves me] 중에 뭘 써야 할지 고민했음.

2. 아몬드는 최근에 읽은 소설들 중에 제일 재밌었음.(사실 소설은 1.5년 만에 처음 읽음)

3. 새로운 콘텐츠 아이디어 마인드맵 그리다가 새벽 네 시에 기절함. 이젠 8시간 안 자면 힘든 몸이 되었음.

4. 아파서 연휴 내내 누워있다가 이제야 가짜 사나이 Season 1 정주행하고 정신 무장함.

5.  사실 아직 조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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