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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Dec 31. 2021

나는 언제까지 주류(Major)일 것인가

책 [사이보그가 되다]리뷰

몇 번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저희 삼촌은 학교 폭력으로 인해 청각장애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삼촌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귀를 가득 채우던 세상의 모든 소리들과 작별해야 했죠. 성격이 불같았던 아빠는 길길이 날뛰며 주동자들을 다 죽일 기세였지만. 어째서인지 삼촌은 오히려 담담하다고 했었습니다.


삼촌은 보청기를 잘 끼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답답해하며 제발 보청기를 끼라고 했지만. 삼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할 때만 보청기를 꼈고, 그마저도 필요 없을 때는 잘 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들 삼촌에게 보청기를 꽂으라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삼촌이 그런 장애가 있기에 불편하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이 두 문장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들 삼촌에게 보청기를 꽂아 "정상"이 되라고 요구했던 것이고. 삼촌이 그런 장애가 있기에 "제가" 불편했던 것이었죠. 그제서야 제가 어쩌면 삼촌에게 보이지 않는 강요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책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가 있는 두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장애와 정상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등짝이 따끔거릴 정도로 신랄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느낀다는 것 자체도 어떻게 보면 제가 신체적 장애가 없기 때문에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보았기 때문인 거겠지만 말입니다.



장애와 정상에 대해서. 
어느 가정이든 휠체어는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의 몸이 나와 동떨어진 객관적인 사물이나 타자로 보일 때면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혼란스럽지만, 다른 한편 저 '사물 같은 몸'이 내 의지로 통제된다는 사실 앞에서 새삼스러운 신비로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모든 농인이나 청각 장애인들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고 소리를 들은 사람들 역시 항상 소리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정이 기쁨이 아닌 공포와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장애를 숨겨야 하는 것처럼 다뤘습니다. 병신이라는 말을 써가며 장애가 있는 가족의 경우 밖에 나가는 것조차 막았으니까요. 하다못해 왼손잡이인 제게도 왼손 병신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할머니들도 많았습니다.(물론 다 맞받아침. 더러운 건 어렸을 때부터 못 참았음)


물론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상관없이, 사람이 (주로) 신체적인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슬픔과 안쓰러움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정상에서 멀어졌다.라는 이유로. 그리고 그것이 장애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탄생합니다.


우리는 장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거죠. 장애에도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정상인" 들 이었으니까요.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에게는 그저 보청기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죠. 특정 주파수에 해당하는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사람의 경우, 보청기마다 커버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보청기가 유일한 해결책이 안될 수도 있는 것이죠.


시각 장애인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보이니까.라는 생각으로 팔을 낚아채는 식으로 도움을 주는 방식이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눈을 꽁꽁 가린 채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자신의 팔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마저도 그들에겐 공포가 될 수 있죠. 또한 시각장애인들 역시 그 어떤 것도 안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희미하게 윤곽이 보이거나, 특정 색에 대한 반응을 할 수 없거나 하는 식이 있지만. 우리는 그저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사람들만을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하죠. 불과 몇 분 전에 써내린 제 문장 역시 그에 대해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읽으시는 여러분 역시 고개를 끄덕이셨다면. 우리는 모두 그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데 한몫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프레임은 바로 우리가 씌우고 싶은 프레임. 이겠죠.


제가 주로 듣는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도. 작가님을 모시기 위해 휠체어 출입이 자유로운 여기까지 와야 했다.라는 말을 김하나 작가님이 하셨었는데. 그 말에 묻은 아쉬움과 죄송함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방송을 다시 들으니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장애를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와 그것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기술이 과연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인가. 
사진출처:구글 [오 마이 뉴스]/황우석 기념우표. 책에도 이게 나옴
주의를 기울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를 치료할 과학기술과 의학의 '위대한' 발전에 기대를 걸지만,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장애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니까 기가 지니가 김 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 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치료는 선택지가 될 수는 있어도 절대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왜 휠체어를 위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보다 로봇 외골격이 더 주목과 찬사를 받을까? 이동 보조 기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걷는'것이 더 정상성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예를 들고 있지만. 우리는 정상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 역시 정상인 우리에 맞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 광고에서도 어떤 장애인이 기술의 힘을 빌려 그것을 극복하고 정상인들은 그 모습에 울음을 터뜨리죠. 저 역시 그런 광고를 보며 울었던 쪽에 속한 사람이었고 제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 만이 정상이라 생각했습니다.


황우석 박사에게 바라는 것이 딱 그것이었죠. 앉은뱅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것.


우리는 장애를 그렇게 바라본 것입니다. 미칠 듯이 신기하고 엄청난 기술로 완전히 전세를 뒤집어 다시 "정상인"이 되는 것.


네. 이 모든 것이 망상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의공학 분야에서는 세미나에 갈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기술들을 연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상용화, 일반화, 그리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쓰는 기술이 되기 까지는 최소한 몇십 년은 걸릴 것입니다.(여담이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바이오 기업들 중에서 기적에 가까운 헛소리를 하는 기업들은 거르시는 게 답이라는 겁니다.)


다시 돌아와 말하자면 최신형 휠체어는 존재할 수 있지만.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이기에. 이런 최첨단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데도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이렇게 기술만이 유일한 해답인 것처럼 추앙받는 세태를 작가들은 매우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봐도 휠체어를 위한 비탈길 하나 만드는 게 더 쉽죠. 그러나 우리는 그런 기기를 이용해 그들이 다시 정상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을 너무도 표본처럼 삼고 있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치료방법들이 다양하게 있으며 그들이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우리는 그저 묵살합니다. 다시 정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압박을 하고 있는 셈이죠.


문득 용감하게 보청기를 거부했던 삼촌의 모습이 스칩니다.





장애란, 현대 사회에선 암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네이버 블로그/진짜 마인 부우 때문에 화나서 한동안 마시멜로를 안 먹을 정도였음.

예전 만화 중에 드래곤볼 이라고 아실까요. 거기에 보면 손오공의 필살기 중 하나로 원기옥 이라는 기술이 나옵니다. 손오공이 하늘 높이 두 손을 뻗어 올리면 온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힘을 보태 엄청나게 큰 에네르기파 같은 것을 쏠 수 있었죠.


이것을 마치 암에 걸리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물론 젊은 나이에 걸리기도 하지만 암은 세포가 분열을 하다 쌓인 돌연변이로 인해 탄생한 단 하나의 비정상적인 세포에서부터 시작하는 병입니다. 마치 원기옥 처럼 그 돌연변이가 축적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대문에 비교적 인생의 후반부에 찾아오는 병입니다. 또한 그 병에 완치되는 사람들을 빼면 원기옥의 크기만큼이나 무서운 병이기도 합니다.


암 관련 유전자를 없애면 암이 완치되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개 구충제가 암에 특효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가둬놓고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기말고사로 자신에게 유방암 유전자가 있다는 이유로 가슴을 절제한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찬반론을 A3용지 세 장을 앞뒤로 서술해야 하는 문제를 풀어보고,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에 암은 더더욱 무섭고도 신비한 병입니다.(참고 1)


물론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암은, 최소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망률 1위에서 내려올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참고 2)


현재의 우리는 암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암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죠.


그것은 치료일 수도 있고, 예방일 수도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이뤄진 습관들로 인한 암의 지연(Delay) 등이 그 방법일 것입니다.


장애도 이와 같을 겁니다.


그것이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심하건 심하지 않건 장애는 우리 사회에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갈 것입니다. 그것을 없앨 수 없다면. 그것과 공존하는 법을 알아야겠죠. 이런 걸 먹으면 암에 걸린다는 생각에 무서운 생각이 든다면. 이런 것 때문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이깟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상상력이 비약하고 너무나도 주류(Major)에 속하는 제가 다 답답해지는 오늘이네요.



마치면서 

한때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점거해 지하철 운행에 차질이 빚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뉴스에 달린 댓글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이 더 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걔들이 장애 때문에 더 뒤틀려서 더 나쁘고 더 짜증이 많다. 자기들만 생각해서 저런 행동하는 것 좀 보소.


라는 뉘앙스의 댓글이었습니다.


장애인은 왜 착해야 하죠?


왜 우리는 장애인이 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성격에 있는 결함이 왜 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과연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까지고 비장애인일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예비 장애인으로의 삶을 하루씩 더 연장하며 사는 것 외엔 그들과 다른 것이 없죠.


이 책은 2021년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필사를 한 책입니다. 필사를 하면서도 참 많이 부끄럽더라고요.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주제에 대해 쓴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덕에 김초엽 작가에게 실망했던 것들이 조금 날아갔던 책이기도 해서 한동안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아요.



참고 1

안젤리나 졸리의 경우 BRCA 유전자(유방암 발병률이 높아지는 유전자로 알려져 있음)를 갖고 있어 유방암의 예방법으로 유방 절제를 선택했다. 한때 진짜 강의나 세미나 들어갈 때마다 이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이때다 싶어 그걸 기말고사로 내시면 어떻게 합니까 교수님. 교수님 때문에 대학원 갔잖아요.


참고 2

나는 나의 이 예상이 틀렸기를. 내가 이 발언에 대해 경솔했다고 말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세대에는 어려울 수도 있음.


[이 글의 TMI]

1. 오늘 한 끼도 못 먹고 일하다가 저녁에 밥+멜론 1/4통으로 협상

2. 퇴고할 시간이 없음. 하필 딱 이 책에서 퇴고할 시간이 없어서 더 화가 난다.

3. 어제 모두 망한 실험을 만회하기 위해 오늘까지 야근.

4. 주말에 댓글을 달것습니다.


#사이보그가되다 #김초엽 #김원영 #소설 #도서 #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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