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노]리뷰
이 글은 영화 [시라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늘 자격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과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묻고 또 묻는다.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끝없는 공방의 법정에 하루에도 몇천번을 출석해보지만.판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고개 숙인 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처참한 형벌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에게도 이런 마음의 지옥은 존재했다.
록산.
시라노의 남루한 외모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를 부끄럽게 했다.
마음을 담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시라노를,배심원인 조 라이트 감독은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하다.
이미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랑의 표현에 정통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이번 영화 [시라노]에서도 마음껏 발산했다.
사랑을 닮은 음악으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가면, 꼭두각시.;언제나 가짜는 매력이 없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을 비춘다.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가장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록산(헤일리 베넷)의 사랑을 위해 가면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캘빈 해리스 주니어)은 시라노(피터 딘클리지)의 글 솜씨라는 가면을 빌려 쓰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통해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을 전달한다.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혹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게 해주는 가면이기에 두 남자는 이 가짜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를. 그래서 록산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록산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원했다. 그녀는 편지에 빼곡히 적힌 자신을 향한 미문을 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녀의 이 마음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사랑이 허울뿐임을. 시라노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대사를 읊는 것에 급급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아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의 존재감은 딱 거기까지다. 꼭두각시인데다 가면까지 쓴. 꼭두각시는 그렇게도 매력이 없기에,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대사의 전달력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 크리스티앙의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될 수록, 시라노의 눈빛과 마음을 담은 그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며. 그 진가는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사랑 앞에선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전달되는 것임을.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조 라이트 감독에게 특기가 있다면?;상실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모든 감독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특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 라이트 감독의 그것은 아마 상실과 단절, 혹은 닿을 수 없음에 대해 표현하는 능력일 것이다.
감독은 늘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절벽 앞에서 절규하기보다 절제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기를 선택했고. 이 모든 절제 미는 영화 속의 대사나 배우들의 눈빛(연기)에서 증폭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배우들이 결국은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다.
관객들은 배우의 눈빛을 보며 이 복잡하고 생략된 마음 덩어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자신의 감정 그릇에 담긴 모두를 쏟아붓듯이 사용해야만 한다. 관객마저도 마음의 상실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때. 영화는 다시 사랑의 애틋함과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쓰라릴 것만 같던 마음을 꽉꽉 채운다.
영화 [시라노]가 뮤지컬 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춤이 승무(僧舞)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배우들의 춤사위는 사랑의 아픔으로 공허해진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하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이 록산을 해할까 싶어, 허공을 통해 뻗는 손길들 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려, 몇 번이고 이를 깨물어야만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본능에 가깝고 날이 서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음의 모든 벽이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해진다.
가슴에 담은 진심의 무게를 그 어떤 형태의 좌절 앞에서도 전달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능력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편지의 역할.;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자격.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실질적으로) 시라노가 록산에게 쓰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라는 말 외엔 그 어떤 합당한 말도 어울리지 않을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편지를 써야만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속에 너무 오래 묵혀놓아 이끼가 끼어버린 진심을 돌아봐야 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종이를 채우기 위해. 숱한 단어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마음속으로 골라내는 시간 역시 가져야 했다. 한참이고 고르고 또 고르다가. 상대를 생각하며 까맣게 타들어가 힘 없이 풀썩 내려앉은 감정의 숯검댕이들 중 하나를 겨우 손에 골라 쥐고서.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꾹꾹 써내렸다.
편지는 자신의 마음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큼의 파급력을 지녔지만,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전해야 할 진심이 단 하나임을 편지의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크리스티앙만큼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록산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은 셈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심을 육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에. 록산과 물리적으로 멀어져 전쟁터로 간 지금, 크리스티앙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닿을 리 만무하다. 단 한발로 크리스티앙을 영원히 잠들게 한 총성이 록산에게 더 잘 와닿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사실 영화에서 진심을 상징하는 편지가 달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치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어톤먼트]에서부터 닿지 않고 왜곡되었던 진실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비록 영화의 말미이긴 하지만 와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진실을 내뱉는 순간. 나는 마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진실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이랬노라고.
결국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뒤집어내 록산에게 바친 시라노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리고 시라노는. 어쩌면 감독까지도 고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결말이었다.
마치면서
내게 이번 영화는 [어톤먼트]의 변주 정도로 느껴졌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공식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장치들도 제법 보인다. (물론 원작을 읽은 자의 슈퍼 오지랖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라노]는 마치 감독이 호스트가 된 티타임과 같았다.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내내 마음 안에서 감독이 직접 고른 차가 천천히 향과 색을 내며 짙어져 갔다. 차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고. 호스트가 내어온 모든 장면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가 정성껏 우려준 차 한 잔은 집으로 가는 추운 날씨에 홀짝이기에 딱 알맞았으니. 다음 티타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 글의 TMI]
1. 피터 딘클리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임.
2. 그의 연기를 거론하기도 입 아파서 뺀 것임.
3. 원작도 재미있음.
4. 리뷰 잘 안 써져서 여섯 번 갈아엎음.
카카오뷰도 있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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