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일강의 죽음]리뷰
이 글은 영화 [나일강의 죽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페르소나를 앞세우곤 한다.
팀 버튼에겐 조니 뎁이 있었고, 웨스 앤더슨에겐 빌 머레이가.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에겐 로버트 드 니로가 그 역할을 충실히 시행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표지판 같은 페르소나의 얼굴을 보며 손쉽게 감독의 작품이 주는 포인트나 느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도 자신이 쓰는 책의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넘어 다녀줄 인물이 필요했다. 절대 소멸하지도, 그렇다고 한 작품으로 안녕을 고하지도 않으며, 작가의 작품마다 작가 대신 독자들에게 따스한 인사를 건네줄 인물들. 그렇게 셜록 홈스와 브라운 신부, 그리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진 에르퀼 푸아로(참고 1)가 탄생했다.
회색 뇌세포라는 애칭까지 가진 탐정 푸아로는 전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도 자신의 특기인 추리로 열차가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건을 해결했고. 이번엔 나일강 위의 배 한 척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1937년에서 오늘로의 큰 걸음을 선택했다.
영화 [나일강의 죽음]은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나일강과 이집트의 아름다움은 물론, 갤 가돗의 고전미 넘치는 모습도 함께 담고 있으니. 원작의 내용과 비교해 보며 영화를 보는 재미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작과의 싱크로율;거의 제목만 같은 것 같은 이 기분.
원작이 있는 작품의 숙명은 참으로 가혹하다. 무엇을 살리고 어디까지 축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제작 과정에서부터 해야 하며,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개봉을 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대표 역작 중 하나로 꼽히는 [나일강의 죽음]을 두고, 마치 [해리 포터]처럼 원작의 재림을 선택할지. 아니면 [나는 전설이다]처럼 완전히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들지. 제작진들의 고뇌는 매우 깊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일강의 죽음]은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푸아로의 활약을 줄이고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서사 하나씩을 고이 쥐여주는 방법 말이다.
나일강을 가로지르는 배 위의 모든 용의자들은 원작에도 없는 자신의 사연을 푸아로 앞에서 털어내기 바쁘며, 이로 인해 추리 영화의 필수 요소인 "떡밥"의 관리가 소홀해져버린다. 교묘하게 연결되고 순서를 건너뛰어가며 진실의 문양을 서서히 띄어야 할 떡밥이 인물들의 하소연으로 인해 뚝뚝 끊어지고 생기를 잃는다. 그 결과 영화의 템포는 나일강의 길이만큼이나 늘어지고 따분해져 추리는 이미 저 멀리 밀려났음을 느낄 지경이 되어버린다.
영화의 말미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추리가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버린 주인공의 의자는 다른 잡다한 것들이 엉덩이를 들이 민지 오래다.
카리스마를 되찾으려 목소리에 힘을 싣는 푸아로의 외침은, 마치 자신의 자리 외엔 어디라도 돌아다닐 수 있는 기세로 뛰어다니는 유치원생들의 귓등을 스치는 잔소리 정도의 위력 밖에는 지니지 않는다. 애처롭고, 외면받으며 사태를 진정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붉은색. 사랑, 그리고 생명.;사랑의 화신. 자클린.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은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마치 이 배 위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승차표의 값으로 내야 했던 것처럼.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아주 조금씩의 위선과 비밀을 적당히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눈과 사회의 위치라는 감시망 덕에 적당히 숨겨진 채 마음속에서 선뜻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재클린(에마 매키)의 사랑은 다르다.
그녀에게 사랑은 생명과도 같고, 사랑이 끝나면 목숨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재클린의 태도는 열정적이다. 자신의 그 불타는 감정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그녀는 사랑의 화신임과 동시에 순수함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태도는 리넷(겔 가돗)을 대하는 것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른 사람들 모두 리넷이 가진 돈에 관심을 보일 때. 재클린은 그런 의도 전혀 없이 리넷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리넷 또한 엇갈린 사랑으로 인해 재클린을 잃는 것이 마음 아팠던 것이다. 어쩌면 재클린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조각의 순수였을 테니.
드레스만큼이나 붉은 그 열병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세 명의 피를 제단에 바칠 때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단 위에 기꺼이 자신의 순수함과 영혼마저도 올려놓고 나서야. 재클린은 깨달았다. 열정만으로 가득했던 사랑은 이미 이 배를 타기 전에 끝이 났다는 것을.
재클린의 죽음은 마치 그녀의 말에 대한 책임감처럼, 피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500일의 썸머 푸아로편;그의 성장기
추리 소설의 중심은 탐정이 되어야 한다.
그는 작가의 분신이며 사건의 중재자인 동시에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탐정의 정체가 회색 뇌세포를 가진 푸아로라면, 기꺼이 영화의 많은 지분을 할애했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초반에 암시하는 푸아로가 겪은 사랑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 중 자신의 사랑을 잃었고 이로 인해 마음마저 회색빛을 띤 채 영원히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로 인해 푸아로의 눈은 다른 인물들이 가진 사랑, 혹은 사랑의 상실에 더 많은 관심을 얹어 세상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이별 뒤에 들리는 모든 노래들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래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수단과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사랑에 대한 열정을 확실히 보여주고 숨을 거둔 재클린을 보며. 푸아로는 사랑의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잠깐 보인다.
그는 마치 영화 [500일의 썸머]의 톰(조셉 고든 레빗)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여름 정오의 햇빛 같던 썸머(Summer,조이 데샤넬)를 건너 드디어 오텀(Autumn)을 만날 준비가 된 것처럼. 자신의 상처임과 동시에 다음 사랑의 장애물 같기만 했던 멋들어진 콧수염을 자르고 살로메(소피 오코네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푸아로는 "탐정"이 아닌 "사람"으로의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중심인물이 가진 문제점이나 결핍은 늘 한 작품의 주제를 차지하고 뒤흔들기에, 이 작품은 추리 영화로서의 매력을 단 하나도 보여주지 못한다. 나일강을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배 마냥. 영화는 그렇게 그냥 물살에 흘러가 버리다 끝이 나 버린다.
마치면서
원작을 알고 보는 사람이라면 매우 아쉬운 영화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많은 감정선들이 생략되었고 푸아로의 능력에 감탄해 문장 사이에 머물던 시선을 빨리 끌어당겨 책장을 넘기게 하던 긴장감을 영화에서 재현하지 못했다.
영화 자체가 푸아로 개인의 성장에 희생당한 느낌이 든다.
물론 탐정이라고 해서 매일 사건 속에 파묻혀야 하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명탐정은 자신의 의무는 모두 내려놓은 채 제목과 원작에서 오는 모든 스포트라이트만큼은 다 챙기려 한다. 이 점이 원작의 영화화를 기대하던 모든 관객들에게도 아쉬움을 남길 것이다.
참고 1
많은 표기법이 있지만 정식 한국어판에서 쓴 이름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이 글의 TMI]
1. 다이어트 중간보고:8킬로 감량.
2. 독일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살 빠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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