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면역;쿠르츠게작트, 한눈으로 보는 생명] 리뷰
어느 누구의 삶이라고 예외가 있겠냐만. 회사원으로 총칭되는 사람의 삶은 참으로 단조롭다.
분명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눈을 빛내며 출근길에 오르던 때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는 나를 향해 비치는 아침햇살의 따뜻함에도 짜증을 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심하기만 하다.
출근 후의 모습은 더더욱 우중충하다.
부디 손과 마음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라던 실험들마저 익숙해지다 못해 이젠 신물 난다고 느껴지는 삶이라니. 비록 박사학위가 없는 척척 석사 후 연구원의 삶도 이런데 박사로의 도약은 전혀 꿈도 꾸지 않은 채. 어쨌거나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의 노예가 된 듯한 모습에 괜히 커피만 한 모금 더 들이켤 뿐이다. 이제 커리어에 있어서 더 이상은 심장이 두근 대는 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러던 도중에 사이언스 북스에서 내가 구독하고 있는 유튜버인 쿠르츠게작트(Kurzgesagt)가 다른 주제도 아닌 면역(Immunology)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전공이었던 면역을 다루는 책이라니. 최근에 책을 받아 들기를 이렇게 고대한 순간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려도 있었다. 왜냐하면 면역학은 전공자 사이에서도 복잡하고 어렵기로 악명 높은 학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면역학을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배웠는지로 프로젝트에서 담당하는 일의 수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서 과연 이 책이 면역의 모든 요소들을 얼마나 대중들이 필요한 만큼. 그리고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제아무리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면역체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해도 “진짜” 면역학을 배우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매일 면역력을 높여준다는 정체불명의 영양제를 먹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책의 구성만 보았을 때는 이런 두려움이 조금 더 커졌다. 거의 전공 면역학 원서의 순서를 비슷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역학을 공부하다 쉽게 지치는 요소 중 하나인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한 우려가 책 초반부터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쿠르츠게작트가 가진 장점이 십분 발휘된다. 실사에 가장 가깝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그래픽 도안은 독서를 하는 데 있어 혼란스러울 수 있는 부분을 부드럽게 깎아낸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면역의 부분들이 가지는 특성들은 알아챌 수 있지만 복잡한 부분은 컬러코드(Color coded)로 알아채는 정도에서 마무리한다. 익살스러운 특유의 그림체 덕에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게 면역 시스템의 기본 약속들(세포, 기관, 법칙 등)을 책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에서만 머물거나 면역학의 사실을 위반하는 것들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에 있어서도 이 책은 그런 위험을 벗어난다. 책은 전공 서적에서 다루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잘못된 과학적 지식을 배우거나. 혹은 한쪽으로 치우친 작가의 견해만을 흡수하는 일은 벌어지는 일이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삽화들의 그림체가 친근할 뿐. 이들이 생긴 모양들은 실제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를 느끼게 된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누가 뭐라 해도 내게는 보체 시스템(Complement system)의 삽화였다.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부분이었다. 매우 적절했고. 또한 매우 비슷했으며. 그러면서도 레고 같이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면역학 공부할 때 가장 힘들어했던 부분 중 하나를 이렇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 나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하면. 뼛속까지 이과라고 욕은 먹겠지만 진짜 그랬다. 한참이고 그 페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공책과 이 책을 한데 두고 왔다 갔다 하며 바보처럼 실실 웃었으니까.
또한 번역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면역학 공부를 할 때 가장 어려워해서 이해하려고 일주일 가량을 밤새다시피 매달린 단어는 항원 제시(Antigen Presentation)였다. 개념도 아닌 단어. 물론 면역학을 영어로 공부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도 했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내게 Presentation이라는 단어는 PPT라는 뜻 그 이상, 그 이하의 단어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뜻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했을 때, 한 학문을 풀어내는 데 있어 얼마나 쉽고 적절한 단어를 쓰는 것이 중요한지를 알기에. 이번 책의 번역자(옮긴이)에 대한 관심도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강병철 선생님이 옮긴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매우 놓였다. 그분이 번역하신 거의 대부분의 책을 읽어보았고. 얼마나 이 분의 번역이 매끄럽고 적절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책 [면역]을 읽는 데 있어서도 그 어떤 마음의 걸림돌은 찾지 못했다. 전문 적인 지식을 쉽게 풀어서. 그러면서도 포인트는 잃지 않는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했다.또한 읽어 내려가는 데 있어 Kurzgesagt가 가진 특유의 유머감각이나. 대화하는 듯한 문체도 살아 있었기에. 행복한 독서를 했다는 경험으로 남을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었다.
선생님이 직접 진행하시는 세미나에도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 책에 대한 강의까지 듣는 호사를 누리고 나니. 전달받은 절반 가량의 책이 아닌 후반부를 빨리 내놓지 않으면 기절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어서 정식 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정신없이 필기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교수님은 자신의 ppt를 오래 쳐다보고 계셨다. 그 눈길에는 어쩐지 아주 약간의 슬픔도 배어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슬쩍슬쩍 교수님의 옆얼굴을 계속해서 훔쳐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필기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교수님은 다시 학생들을 바라보며 결국 내 인생을 바꾸고도 남은 한 문장을 던지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스템입니까.
순간 교수님의 얼굴에서 총기 어린 한 학생의 일대기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공부를 하며 느꼈을 좌절과 희열도. 교수가 되기 위한 길에서 맞이했을 수많은 시련도. 그 모든 일을 겪은 한 소년은 그때의 나를 만나 이 학문이 그래도 평생을 걸어 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면역학이라는 학문에 영혼의 일부를 갖다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는 힘들었고. 이해할 수 없었으며 복잡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전공과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언제나 웃으며 면역학이라고 말했다. 한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이 책은 내게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순수하게 학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연구원이 되기를 갈망하던 나의 모습이 책장마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결국 책을 덮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울음이 터져서 한참이고 연구소 벤치에 앉아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문득 내가 걸치고 있는 연구실 가운을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그리도 바라던 원대한 꿈에서, 딱 한 입 가득 베어 문 정도를 이룬 사람이 되기는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아이에게 최소한의 선물은 해 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앞으로의 선물도 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 순간도 견뎌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연구소로 들어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이 월급날이라는 생각도 하면서.(금융 치료 소듕해)
책을 선물 받은 줄 알았더니. 초심을 찾아줘 버린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현실이라는 말로 애써 벽을 치며 숨겨 놓았지만. 다시 한번 박사 학위를 향한 다짐을 굳게 먹어보는 순간이었다.(응?)
이 리뷰는 사이언스 북스로부터 가제본 책을 제공받고 작성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논문 읽는 것도 즐거워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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