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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Dec 19. 2019

(16) 문해력 높이기:발버둥 프로젝트

냉정한 이타주의자

작가:윌리엄 맥어스킬/전미영(옮긴이)

출판사:부키

이 책은?:현명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읽으면 좋은 책

평점:★★★


[이 책을 한 문장으로?]

1. 기부에 숨은 진실을 알고 싶다면?

2. 새로운 의견을 늘 내는 사람들이 알고 싶다면?

3. 첫째와 둘째 중 누가 더 독창적인지 알고 싶다면?


[책의 구성 및 내용]

Chapter 1 당신은 상위 1퍼센트다
얼마를 더 벌어야 행복할까?

PART 1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이타주의자
효율적 이타주의의 5가지 사고법
Chapter 2 선택의 득과 실
첫 번째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
Chapter 3 당신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두 번째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
Chapter 4 재해구호에 기부하면 안 되는 이유
세 번째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
Chapter 5 1억 2000만 명을 구한 사람
네 번째 우리가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Chapter 6 투표는 수십만 원 기부나 다름없다
다섯 번째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PART 2 착한 일을 할 때도 성과를 따지는 냉정한 이타주의자
효율적 이타주의의 실천적 해법
Chapter 7 CEO 연봉과 기부금
가장 효율적으로 남을 돕는 곳은 어디일까?
Chapter 8 차라리 노동착취 공장 제품을 사라
착한 소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Chapter 9 열정을 따르지 마라
세상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직업은 무엇일까?
Chapter 10 빈곤 대 기후변화
어떤 문제가 더 중요할까?


[서평:엄마 미안해.]

이번 서평은 심장에 매우 해로울 수 있습니다. 경고했다잉.

백설기에 박힌 콩 세 개.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순둥이.

남동생이 (그 당시) 여자 친구에게 선물 받은 강아지의 이름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동생이 강아지를 안고 들어왔었다. 강아지를 워낙 좋아하는 나였기에 마치 내가 선물을 받은 것 마냥 좋다고 소리를 질러대며 강아지가 몸살이 나도록 안아보고 뽀뽀를 퍼부었다. 이내 소변을 침대에 지리는 바람에 엄마는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돌려주라고 주라고 난리였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는 기쁨에 취해있던 남동생과, 강아지 키우고 싶다는 말을 안녕하세요 보다 자주 하는 내게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잘 때도 천사 같았던 우리 순둥이.

귀가시간이 빨라진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부모님 집에서 쉬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가도 정말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엄마 몰래 순둥이가 저질러놓은 흔적들을 모두 없앴고 창문도 열어 환기까지 완벽하게 해 두었다. 빨래도, 청소도, 설거지도 모두 해놓고 완벽한 집 상태를 만들어 놓는 것도 당연했다. 우리 가족들 중 순둥이를 가족으로 들이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고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순둥이 때문에 또다시 집안일을 시작해야 하는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둥이가 한창 클 때. 나는 집을 떠나 생활해야 했고, 그렇게 순둥이를 보고싶다는 갈망은 늘 커져만 갔다.

"순둥이는?"

아쉽게도 순둥이와 보냈던 짧았던 몇 주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늘 부모님이 전화를 걸어오면 부모님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순둥이가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남동생이 데려오기만 해 놓고 돌보지를 않는다며 투덜거리다가도 내 말에 너는 가족보다 강아지 새끼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핀잔을 주곤 했었다. 그런 엄마가 난 참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갖다 버리라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쉽게 할 수 있을까.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에게. 순둥이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갈수록. 엄마에 대한 미움도 아주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아주 길면서도 짧았던 바깥 생활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순둥이는 다행히 나를 알아보았고, 꽤나 많이 커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도 많이 커져있었다. 그리고 그 큰 목소리로 순둥이에게 소리를 치는 엄마와 나는 다투는 횟수도, 시간도 점점 늘어갔다. 순둥이도 엄마 눈치를 슬슬 보며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내게 달려와 안기기 바빴고, 나는 그런 순둥이를 다독이며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내 방으로 들어오곤 했었다. 꼬리가 엉덩이를 흔드는 건지, 엉덩이에 달린 꼬리를 흔드는 건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반갑게 내게 안기는 순둥이에게 나는 정말 푹 빠져있었다.


누나 어디 있어.

그때는 그저 순둥이가 나를 잘 따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같잖은 우월감을 갖고 다시 집을 떠난 내게, 아빠가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내가 집에 머무는 동안 입었던 옷을 엄마가 빨래하려고 잠시 집 복도에 놔둔 것인데 순둥이가 그 위에 저렇게 누워 엄마가 손도 못 대게 하고 있다는 사진이었다. 아마 네 체취가 묻어 있어 그런 거 같다며. 아빠는 기특함 반 울음 반 섞인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었다. 엄마에겐 무서워서 한 번도 대든 적이 없던 순둥이었는데. 엄마를 물려고 위협까지 하면서 저렇게 내 옷 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귀여운데. 엄마는 정말 왜 그렇게까지 몸서리를 치는 것인지. 더더욱 이해가 안 되기만 했다.


헤헤. 누나다 누나.

그 뒤로도 우리는 순둥이와의 그 아슬아슬한 동거를 꽤 오래 이어 나갔다. 여전히 엄마는 순둥이에게 마음을 반 밖에 열지 않았지만 아빠와 나와 남동생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집을 치우고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도 순둥이를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부모님이 자기 자식 자랑하는 것처럼. 우리 집 개가 남의 집 개들보다 훨씬 똑똑하다며 순둥이 최고를 외쳐대기 바빴다.


하지만 그 동거는 꽤 큰 장애물이 생겨. 결국 끝을 맺게 되었다. 

나는 그때 미국에 가 있었고, 길어진 연휴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곳에 혼자 오는 게 찔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었는데 아빠가 받았었다. 그래서 아빠와 실컷 통화를 한 뒤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아빠가 좀 머뭇 거리셨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엄마가 수술을 했다고 하셨다. 나는 당시 거나한 점심을 먹은 후였고, 커피와 디저트를 눈 앞에서 한참이고 사진을 찍은 후였기에, 아빠의 그 말은 살짝 몰려오기 시작하는 식곤증을 저 멀리 보내버리기에 충분했다. 엄마의 수술로도 모자랐다. 간호를 해주기 위해 이모가 우리 집에 잠시 계셨는데 이모가 개털 알레르기가 있어 순둥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아빠가 했을 때의 충격이란.


나는 그 이국땅의 카페에 앉아서 두 가지 안 좋은 소식에 절망해 눈물 콧물 다 쏟으며 겨우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소식 중 어떤 것이 더 슬펐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복잡한 감정이 들어 정말 주위 사람들이 Are you OK sweet heart?를 몇 번이나 연발한 뒤에야 겨우 진정을 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 사람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온 카페가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었다. 


순둥이는 우리에게 온 것처럼. 그렇게 급작스럽게 다른 집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다. 집안에 조금은 배어 있던 개 특유의 냄새가 점점 옅어지는 게 너무 아쉽고 싫었고, 순둥이의 체취가 묻은 담요나 수건을 버릴 때는 남 부끄러울 정도로 울었다. 모니터가 뚫어질 때까지 순둥이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오열한 것은 당연하다. 


유튜브 채널 Mocha milk의 사모예드 우유

그리고 그렇게 나는 "랜선 집사"가 되었고, 순둥이와 닮은 강아지를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것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강아지를 키울 수 있을 날을 만들기 위해. 강형욱 훈련사님의 유튜브도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었다.  


 내가 순둥이를 좋아했던 방식이. 과연 순둥이에게도 행복하게 작용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사료의 양은, 물은 적당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적재적소에 있었는지.

놀자고 내게 말을 걸던 그 시그널(Signals)들을 나는 귀찮다며 안고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닌지. 

산책은 충분했는지.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서 장판을 뜯는 것은 아니었는지. 

너무 감싸고 돌기만 해서 분리 불안이 생긴 것은 아니었는지. 

무작정 퍼붓기만 했던 사랑이 과연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이었는지. 


나는 내가 뉴욕에서 아빠에게 전화를 받고 울었던 그 두 가지 이유 중 어떤 것이 더 컸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후자였다. 당연하게도. 엄마가 수술했다는 사실보다 순둥이가 우릴 떠나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의 정답은 전자에 가까워야 했다. 아니. 전자여야만 했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순둥이를 마당이 있는 집에 보내자는 엄마의 말도 단지 내가 헤어지면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피했었다. 좋다. 귀엽다.라는 감정에 휘말려, 이 아이(순둥이)에 대한 정확한 훈육법은 마음이 아프다며 회피해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엄마는 결국 스트레스에 과로까지 겹쳐 어쩌면 하지 않았어도 될 수술까지 해야 했고, 나는 졸지에 강아지 때문에 슬픈 건지, 엄마 때문에 슬픈 건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못나고 쓸모없는 딸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감정에 호소하지 말 것. 

감정에 호소하는 사람은 주의할 것. 

내 감정을 내가 스스로 절제, 조절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말 것. 

그 결정이 늦어도 좋으니 최대한 선한 쪽으로 결정할 것.

훗날 내 결정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사과할 것. 


멍청했던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아주 조금은 냉정함을 장착할 수 있었다. 비록 아직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울컥 올라올 때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만의 행복을 위해. 눈을 가리지 말라. 

진실은 아픈 곳에 있으며 그것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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