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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May 08. 2020

크리스토퍼 놀란, 기억과 무의식의 마술사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그림출처

(병맛 주의) 이 글에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웬만하게 유명한 영화"들"(특히 메멘토, 인셉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잉.


1998년 첫 작품인 "미행"을 시작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초대장을 몇 번이고 안겨주었다. 그가 초대한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어딘가 일그러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단순히 그가 그리는 세계가 너무도 현실적이거나 꿈도 희망도 없기 때문이 아닌, 그가 일그러뜨리고 재구성하는 것이 시간과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과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맛보게 한다. 그의 이런 취향(?)은 여러 작품에서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메멘토, 구슬이 서 말인데 왜 꿰지를 못하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새겨진 문신 조차도 바래지며 존재를 잃어간다.하물며 기억쯤이야.

그림출처

우리는 기억이 과거의 경험을 단순하게 촬영한 비디오 같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아니다. 비디오 촬영에는 그 장면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중요하게 담긴다. 어떤 부분을 가장 주요하게 강조해야 할지 따로 고르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비디오 촬영은 있는 그대로를 정확히 기록한다. 이에 반해 기억은 실수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172P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이 충격이 되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인 레너드. 단 10분 전의 기억만이 그에게 "기억"이라 불릴 수 있는 전부라, 그는 그가 "기억"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을 온몸에 문신으로 남기기에 이른다. 이토록 그가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 가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함이다.

기억이란 하나하나 서로 다른 순간들이 모여있는 것이고 뇌가 이런 순간들을 묶어 연속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가정해보자.-173P

그러나 이런 스냅사진들은 재구성될 수 있다.-174P

그리고 그 변하지 않는 문신을 바탕으로, 그는 그의 머릿속에 남겨진 10분짜리 스냅사진의 묶음을 통해 그는 자신의 기억을 하나하나 짜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섬광처럼 짧지만 강렬한 자신의 기억은 정확하다고. 그렇기에 그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안타깝게도.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뇌는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고, 그 재구성의 끝에 기억은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 또한 시간이 지난 사건일수록 기억이라는 것은 정확도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사실이라는 뼈대를 바탕으로 해, 우리의 무의식은 그 듬성듬성한 부분에 살을 덧대어 그 간극을 메워준다. 이 작업에서 무의식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고, 그 순간이 스스로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뇌는 원본과는 다른 무늬의 비단 한 폭을 짜기 시작한다.(176p 172P)


마지막에 가서야 내지를 수 있는 비명과 탄식.

그림출처

뇌의 무의식은 과거 경험을 회상하고 시연하는 방법으로 옛 정보를 시뮬레이션 해 우리의 학습과 성장을 도와준다. 무의식은 방대한 기억 저장 창고에서 정보를 가져와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해 준다. 문제는 기억이 항상 믿을만한 정보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165P

이런 교묘한 특성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현재에서 과거로(컬러), 과거에서 현재로(흑백) 거슬러 올라오는 방식의 교차 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이미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결말을 보여주지만, 그 결말이 담는 의미가 무엇인지 영화의 끝에 가서야 전율을 느끼며 겨우 알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레너드가 10분만 기억하는 것이 아닌 정상적인(평균적인) 기억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런 무의식의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는 한  그의 선택은, 혹은 영화의 결말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셉션, 기억이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셉션의 컨셉을 잘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장면.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도.

그림출처

꿈이 그토록 창의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해석이 있다. 몇몇 신경과학자들의 이이론에 따르면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는 미리 형성되어 있던 시냅스가 느슨해지면서 기억과 학습된 개념 사이의 관계가 완화된다. 이론적으로 이 상태에서는 신경세포의 가변서 이 늘어나 뇌에 새로운 경로가 형성되고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44P

아무리 꿈이 기괴해도 우리가 꿈속에 있는 동안에는 꿈이 기이하다는 사실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 꿈에서 깬 뒤에야 그 상상 속 시나리오가 얼마나 이상한지 깨닫는다-42P

단 두 작품만으로 천재 감독들의 반열 중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한 놀란 감독은, 배트맨 시리즈와 프레스티지를 거쳐 인셉션에서 자신의 장점인 예술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 잡기를 극대화한다.(부러운 놈) 무려 10년이란 세월을 매만졌다는 이 시나리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꿈. 누군가의 꿈에 침투해 아이디어나 기억을 훔치는 일을 하는 "코브"라는 (얼굴로 열 일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고 타깃의 머릿속에 새로운 기억을 심는 인셉션(Inception)을 시도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자 내용의 근간이 된다.

기억은 바뀔 수 있고 인공적으로 이식될 수 있다. 뇌는 순간순간의 스냅사진을 배열해 연속적인 기억으로 만들어 낼 때 다양한 출처에서 스냅사진을 가져온다-193P

사실 이런 발상은 허무맹랑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꿈이란 것은 우리가 깨어있을 때 보고 들은 것들을 재조합하여 벌어지는 것들의 향연이다. 그렇기에 물리학 법칙이 가볍게 무시된, 하지만 고도로 정밀하고 치밀하게 짜인 꿈이라는 무대를 통해 코브는 자신의 타깃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곳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유유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남의 꿈 훔치랬더니 남의 마음을 훔치고 있네

그림출처

마음의 기억이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은 부풀린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이런 교묘한 술책이 있어서 우리가 과거의 짐을 견뎌낸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그는 아직 너무 어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사실이라고 믿으면 거짓말이 아니다.-193P

그렇게 창조한 세계에서 신처럼 보이던  코브가, 자신의 기억 깊숙한 곳에 트라우마를 감춰놓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숨겨놓았다고 자신했던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봉인 해제되어 날뛰는 것을 보며 코브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어쩌면 통제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무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브는 차라리 숨기지 않아야 했다. 오히려 동네방네 떠들며 트라우마를 노출해야 했다. 무의식으로 들어가 버린 아내에게 두 번 다시 잠식당하지 않기 위했다면. 과연 코브가 했던 행동은 "위험한"그녀를 숨기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당당하지 않은  추한 기억의 형태였을까.  


감독님 이과세요?왜이러세요 저희한테.아 물론 저도 이과인데. 너무하시잖아요.

그림출처

테넷, 그의 손에서 우리의 손으로 건너올 또 다른 초대장, 사후세계


물리학자에게 자문까지 받아가며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 이동으로 인한 시공간의 초월까지 다뤄낸 그가, 이제는 사후세계를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빗댄(추측임) 다룬 작품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초대장을 작성하고 있다. 그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 그 일그러진 시간, 혹은 기억의 틈을 메꾸는 처참한 방식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그가 제발 빨리 초대장을 내게 가져다주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가끔 그의 상상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가 이토록 천재 소리를 저주처럼 사무치게(?) 듣는 이유는 어쩌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진득한 관찰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에 말도 안 된다는 말로 여겨졌을 세계를 다시 집어 들어 우리에게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신.

감독님 쉬지 말고 일해요.

15년간 군만두 먹고 싶지 않으면. 시간 나면 크리스찬 베일한테 배트맨 다시 한번 찍어달라고 전화라도 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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