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와 변덕 사이
브랜드 기획자는 언제나 자료와 논리로 무장한 채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시장조사 리포트, 소비자 인터뷰, 경쟁사 분석표, 원가 시뮬레이션까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설계도를 그리기 위함이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논리와 데이터가 있다면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기획의 생사는 때로 결재권자의 변덕, 한마디 말에 달려 있었다.
처음으로 그 벽을 마주한 건 어느 스킨케어 신제품 프로젝트였다.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한 기능성 라인을 준비하면서, 나는 경쟁사 분석과 소비자 조사로
수십 장의 보고서를 채웠다. 소비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지점은 “효과는 빠르지만 자극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품 콘셉트는 ‘저자극·고기능’으로 정리했다. 가격은 3만 원대 초반,
원가 구조도 나쁘지 않았다. 개발팀과 함께 샘플을 세 번이나 수정했고, 마침내 모두가 만족하는
시제품이 나왔다. 협력사와의 분위기도 좋았다. 오랜만에 기대할 만한 성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결재 회의는 차갑게 끝났다. 대표는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거 마음에 안 들어. 뭔가 느낌이 별로야.” 그 순간, 몇 달간의 노력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 이상의 토론도, 반박도 허용되지 않았다. 회의실은 정적에 잠겼고, 팀원들의 어깨는 한순간에 축 처졌다.
협력사 담당자는 자리에서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기획의 시작은 논리로 하지만, 최종 결정은 변덕에 달려 있다는 것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었다. 애견 샴푸 프로젝트도 그랬다. 시장조사 자료와 수십 건의 피드백을 모아
수개월 동안 준비했지만, 대표가 “애견 시장은 작아. 다시 생각해보니 별로야”라는 말 한마디로
프로젝트는 접혔다. 협력사와의 신뢰는 크게 흔들렸다. 샘플을 수차례 만들어낸 제조사의 담당자는 결국
“다음에는 정말 확실히 진행되는 건가요?”라는 냉소 섞인 질문을 던졌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프로젝트가 엎어질 때마다, 팀의 사기와 협력사의 신뢰가 함께 꺼져갔다.
그때부터 나는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논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략을 세웠지만,
최종 결정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설명하기 힘든 ‘감’이나 ‘기분’이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팀원들 사이에는 냉소가 번졌다. “어차피 또 엎어질 텐데 뭐 하러 열심히 해?”라는 말이
회의실에 떠돌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변덕을 없앨 수는 없지만, 대비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세 가지 기준을 만들었다.
첫째, ‘금기어’를 기록했다.
결재권자가 듣기 싫어하는 단어나 주제를 미리 정리하고, 보고서에서 최대한 피했다.
어떤 대표는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불필요한 고가 전략이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의미라도 ‘고기능’이나 ‘차별화 포인트’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둘째, ‘취향’을 관찰했다.
결재권자가 좋아하는 색상, 디자인 톤, 브랜드 레퍼런스를 메모해 두고, 초기 기획안에 반영했다.
데이터보다 취향이 결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대안’을 준비했다.
한 가지 안만 들고 가지 않고, 최소 두세 개의 플랜 B와 플랜 C를 준비했다.
“이게 아니라면 이런 방향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세 가지 기준은 나를 지켜주는 안전망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변덕은 존재했다.
그러나 최소한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은 줄어들었다. 프로젝트가 엎어져도,
나는 곧바로 다른 대안을 꺼내 들 수 있었다. 팀원들도 더 이상 무력감에 빠지지 않았다.
협력사와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적어도 “계획 없이 흔들리는 집단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브랜드 기획자의 자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브랜드 기획은 논리와 변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논리로만 무장하면 현실의 벽을 뚫을 수 없고, 변덕에만 휘둘리면 전략이 사라진다.
두 가지를 동시에 끌어안고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기획자의 역할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데이터와 논리로만” 승부하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인간의 감정과 취향, 이해관계와 정치적 맥락이
제품화 결정을 좌우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획자는 번번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보고서를 만들 때 데이터와 감성, 논리와 취향을 함께 고려한다.
설득은 수학공식이 아니라 인간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1문장
기획의 시작은 논리로 하지만, 기획의 마무리는 변덕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