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조율과 책임감의 사이
코로나 초창기, 손소독제와 마스크가 전국을 뒤덮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회사 대표는 회의실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도 손소독제를 빨리 만들어야 해. 늦으면 기회를 잃는다.”
그의 말은 지시라기보다 압박처럼 느껴졌다.
개발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검토 절차들이 있었지만, 속도가 전부라는 분위기 속에서
그 절차들은 하나둘씩 건너뛰어졌다. 시장은 불타고 있었고, 대표는 불길 속에서
단 하루라도 빨리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료를 구하는것도 어려웠지만 포장재 수급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도권 공장은 이미 주문이 포화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전북 지역의 한 인쇄 공장까지 찾아가야 했다.
일정은 급히 잡혔고, 나는 디자이너와 함께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긴장과 피로가 뒤섞인 채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 못한 광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인쇄 견본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고,
파우치 위에는 번진 잉크와 왜곡된 로고가 찍혀 나오고 있었다.
글씨는 흐렸고, 색상은 우리가 최종 확정한 것과 달랐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만약 이 포장재가 그대로 출하된다면,
돈은 돈대로 쓰고, 물건은 판매조차 하지 못하게 될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장 공기는 얼어붙었다. 작업자들은 이미 기계를 멈출 수 없다고 했고,
대표는 전화로 “일정이 늦어지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가는 더 큰 재앙이었다.
결국 동행한 디자이너가 현장에서 사무실로 들어가 파일을 수정하고,
나 역시 담당자에게 강하게 요구해 기계를 멈추게 했다.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 조치 덕분에 큰 사고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리 사장이 조급하게 지시해도,
사고가 터지면 결국 수습은 실무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그 사건 이후 나는 일정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일정은 단순히 ‘마감일’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브랜드의 신뢰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일정표 옆에 반드시 체크리스트를 붙였다.
다섯 가지 기본 항목, 즉 원고 검수, 인쇄 견본, 용기 샘플, 라벨 색상, 유통기한 표기.
이 다섯 가지는 어떤 경우에도 생략할 수 없는 절차였다.
단 하나라도 빠진 상태에서 일정이 강행된다면, 나는 보고서에 ‘진행 불가’라는 문구를 남겼다.
처음에는 대표도 불편해했지만, 그 메모 덕분에 이후 몇 번의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뒤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때는 신제품의 용기 인쇄였다. 일정에 쫓겨 샘플 확인 없이 제작에 들어발뻔 했는데,
결과는 패키지의 문구 하나가 잘못된 채로 인쇄된 것이었다.
자칫하면 국내 판매가 불가능할만큼 치명적인 오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반부터 체크리스트를 강조했기에 대량 인쇄 직전 발견할 수 있었고, 전량 폐기를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일을 미리 보지 못했다면, 막대한 비용 손실을 떠안아야만 했을것이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조급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조급함은 시간만 빼앗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미래까지 갉아먹는다.
대표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시장에 내놓는 것이 성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루를 아끼려다 몇 달을 잃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특히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처럼 소비자가 직접 몸에 바르는 제품에서는
작은 실수 하나가 회사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
포장재가 엉망으로 나가면 소비자는 “이 브랜드는 대충 만든다”고 느낀다.
라벨 표기가 잘못되면 “안전성에 무심하다”고 받아들인다.
그 후 나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팀원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빨리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정해진 순서는 건너뛰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사고를 막아주는 안전망이다.
일정이 조금 늦어지는 정도를 소비자는 기다려준다. 그러나 불량한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
소비자의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그 신뢰는 몇 년이 지나도 회복하기 어렵다.
이 “손소독제 사건”은 내 커리어에서 작은 사고였지만,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였다.
그날 이후 나는 일정을 단순한 마감이 아니라 브랜드를 지키는 ‘약속’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정에 쫓겨 절차를 건너뛰는 순간, 우리는 결국 비용과 평판으로 몇 배의 값을 치르게 된다. 그
뼈아픈 경험은 내 기획 철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내가 배운 1문장
누가 뭐래도 정해진 순서는 지켜야 한다. 일정이 아무리 급해도, 사고가 나면 수습은 실무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