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샴푸를 통해 배운 교훈
프로젝트의 시작은 너무도 단순했다.
대표가 키우던 반려견과 지인인 애견샵 사장님의 한 마디였다.
“우리 고객들이 원하는 샴푸가 필요해. 시중 제품은 뭔가 아쉽거든.”
회의실에 앉아 화이트보드에 강아지 그림을 그려 넣던 날을 기억한다.
“저자극, 순한 거품, 용량은 500ml 펌프형으로.”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회의는 빠르게 흘러갔다.
네이밍과 컨셉은 보름도 안 돼 정리되었고, 주성분, 패키지, 디자인 방향까지 일사천리로 확정되었다.
당시의 나는 속도가 곧 실행력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곧 능력이라고 착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믿음이 바로 첫 번째 착각이었다.
첫 샘플이 나오고 나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애견샵 사장님은 단골 고객들에게 시제품을 나눠주며 의견을 모았다.
그때부터 피드백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향이 너무 약해요.” , “거품이 좀 더 났으면 좋겠어요.”
“린스가 잘 안 돼요.” , “목욕을 시키고 나니까 냄새가 남아요.”
나는 메모지를 가득 채우며 모든 의견을 성실히 받아 적었고, 최대한 반영하려 애썼다.
샘플은 계속 피드백을 개선하기 위해 2차, 3차, 4차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치명적인 문제와 단순한 취향을 구분하지 못했다.
저자극과 린스성 같은 본질적인 항목과 향이나 라벨 색 같은 개인적 선호를 같은 무게로 다룬 것이다.
“고객 중심”이라는 명분에 매달려 무엇을 걸러내고 무엇을 반영해야 할지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의견을 반영할수록 문제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문제가 튀어나오는 연쇄 반응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제조원가는 계속 올라갔다. 원가가 오르자 판매가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경쟁 제품 대비 가격 경쟁력을 잃어갔다. 리드타임도 문제였다.
용기 실링 불량으로 데이터 수정을 논의하게 되면서 생산은 계속 뒤로 밀렸다.
나는 매번 보고서에 “피드백 53건, 반영 21건, 보류 11건, 무관 19건” 같은 숫자를 적어 넣었다.
숫자는 부지런함을 증명했지만, 정작 제품의 얼굴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테스트의 목적을 합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경쟁사 제품 대비 더 나은 기능을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세운 브랜드의 콘셉트를
검증하는 건지조차 모호했다. 서로 다른 시험 문제를 한 시험지에 섞어놓은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숫자도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었다.
회의는 늘 “이번에도 고객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냈다더라”는 이야기로 끝났고,
방향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출시는 밀리고 또 밀렸다. 결국 홍보 타이밍을 놓쳤고,
애견샵 판매만으로는 고원가 구조를 방어할 수 없었다.
1년 뒤, 이 제품은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를 “실력 없는 기획자”라고 불렀다. 수많은 밤을 후회하며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모든 목소리를 다 담으려 했을까. 왜 나는 기준을 세우지 못했을까.
시간은 흘렀고, 어느 날 노트를 다시 펼쳐 보았을 때 한 문장이 형광펜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고객 중심과 고객 종속은 다르다.”
나는 고객을 존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고객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기획자가 해야 할 일은 고객의 목소리를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라,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지 가려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단순한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피드백이 정말 중요한 문제인지 먼저 묻는 것.
브랜드의 약속과 직접 연결되는가? 저자극, 린스성, 건조 후 털 촉감 같은 항목은 반드시 반영한다.
반면 향이나 라벨 색, 펌프 손맛 같은 요소는 보류하거나 한정판에서 다룬다.
그리고 여러 명이 같은 말을 했는지 확인한다.
한두 명의 의견인지, 반복적으로 나오는 불만인지 구분한다.
마지막으로 그대로 두면 큰 문제가 되는지를 따진다. 단순 불편인지, 환불이나 CS,
혹은 안전 문제로 번질 수 있는 항목인지 판단한다. 이 세 가지를 신호등처럼 정리했다.
빨강은 즉시 고쳐야 할 것, 노랑은 다음에 고칠 것, 초록은 이번에는 보류할 것.
같은 피드백도 이렇게 기준이 있으면 결론이 달라진다.
“향이 더 진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초록, 개인 취향이니 시즌 한정으로 대응할 수 있다.
“린스가 잘 안 돼서 털이 뻣뻣하다”라는 말은 빨강, 브랜드 약속과 직결되고 반복적으로
나온 불만이라 즉시 고쳐야 한다. “펌프가 가끔 헛돈다”라는 말은 노랑,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누적되면 불편이 될 수 있으니 다음 생산에서 개선하면 된다.
펫 샴푸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내게는 값진 교훈을 남겼다.
지금 같으면 처음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해결하려는 불편은 ‘린스가 어렵고 털이 뻣뻣해지는 경험’입니다.
이 문제를 잡는 게 기준이고, 나머지 취향 요소는 다음 버전이나 한정판에서 다루겠습니다.”
그 기준이 있었다면 방향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모든 목소리를 다 담으면 브랜드의 목소리는 사라진다.
기획자는 고객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걸러내는 사람이다.
그 기준을 세우는 순간, 브랜드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배운 1문장
모든 목소리를 다 담으면 브랜드의 목소리는 사라진다. 피드백에는 기준과 가이드 라인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