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 흡수율에서 백야까지
브랜드 기획자의 책상 위에는 늘 두 가지 재료가 놓여 있다.
하나는 숫자와 데이터, 다른 하나는 이미지와 이야기다.
전자는 시장과 소비자를 설득하기 위한 근거이고, 후자는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서사다.
기능은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감성은 장면과 언어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나는 이 두 재료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를 배워 온 과정 속에서,
브랜드가 ‘이야기’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리포좀 비타민" 프로젝트가 그 시작이었다. 우리가 풀어야 할 키워드는 단 하나, “흡수율”이었다.
비타민은 이미 흔한 성분이었고, 소비자도 수십 개 브랜드를 접해왔다.
차별화하려면 흡수율을 강조해야 했지만, 문제는 그 단어가 너무 추상적이었다.
소비자에게 “흡수율이 높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회의에서 늘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흡수율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해답은 리포좀이라는 기술적 증거에 있었다. 나는 자료를 찾고, 논문을 뒤적이며
그래프와 다이어그램을 정리했다. 세포막과 유사한 구조가 어떻게 성분을 보호하고,
위장을 통과해 혈중 농도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대로는 딱딱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비유를 찾았다.
“비타민이 우산을 쓰고 장마를 건넌다”는 표현은 팀 회의에서 탄생했다.
소화액과 산성 환경이라는 장마 속에서, 리포좀이라는 우산 덕분에 비타민이
안전하게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장면을 그렸다.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케팅팀은 이 비유를 패키지와 상세페이지에 녹여냈다.
데이터와 서사가 함께할 때, 추상적이던 흡수율은 소비자 눈앞에 선명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임원 중 한 명은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데이터 말고, 굳이 이런 비유가 필요할까? 오히려 신뢰성을 해칠 수도 있지 않나?”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그러나 소비자는 학자가 아니었다. 숫자만 나열된 그래프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보고서에는 논문 인용과 그래프를 포함시키고, 소비자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비타민이 우산을 쓰고 장마를 건넌다’라는 비유를 병행하기로 했다.
근거와 서사를 동시에 세운 것이다.
빌베리+루테인 (눈건강) 프로젝트에서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키워드는 “핀란드산 빌베리”였다. 루테인과 안토시아닌은 이미 많은 제품이 사용하고 있었기에,
성분만으로는 차별화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빌베라라는 원료가 자라는 환경에 주목했다.
핀란드의 백야, 낮은 기온, 짧은 여름.
바로 그 자연 조건이 빌베리의 안토시아닌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백야와 야생 환경에서 자라 진한 보랏빛을 품은 빌베리’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생생했다.
그리고서는 회의실에서 디자이너와 논쟁이 벌어졌다.
“패키지에 숲과 해를 동시에 그리면 산만해 보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백야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냥 ‘수입산 블루베리’로 보일 위험이 있어요.”
결국 절충안은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지지 않는 태양의 은은한 빛을 넣는 것이었다.
제품은 기능적 장점뿐 아니라, 한 장의 풍경을 품게 되었다.
백야와 야생 환경이라는 데이터는 감각적 이미지로 번역되었고, 그 순간 제품은 단순한 영양제가 아닌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가 되었다.
이 두 프로젝트는 내게 같은 교훈을 남겼다.
데이터와 정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브랜드의 호흡이 들린다는 것.
리포좀 비타민의 흡수율은 논문과 그래프만으로는 전달되지 않았고, 빌베리+루테인의 강점은
성분 표시만으로는 차별화되지 않았다. 기능을 증거로 설명하고, 그 증거를 서사로 연결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만나야 제품이 브랜드가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숫자와 데이터에만 매달리거나, 반대로 감성적인 카피에만 의존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는 합리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존재다. 한쪽 귀로는 과학적 근거를 듣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 귀로는 이야기와 장면을 원한다. 브랜드 기획자는 이 두 언어를 동시에 번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제품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증거는 어떤 장면으로 번역될 수 있는가?”
두 질문이 동시에 답을 얻을 때 비로소 브랜드는 자기 목소리를 갖는다.
내가 배운 1문장
증거와 서사가 만날 때, 제품은 브랜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