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에서 온 엽서 >

5분 충전의 도시

by 톨루엔

5분 충전의 도시

비는 약속 시간을 쪼개 먹듯 소리 없이 내렸다.

편의점 앞 공용충전대의 LED가 동시에 깜박이며, 도시의 맥박처럼 초록과 파랑을 번갈아 켰다.

“금방이야. 5분이면 돼.”

나는 또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버릇처럼 말하는 5분은 늘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미루고 모아둔 미안함이 충전 표시처럼 96%에서 멈춰 있었다.




우산에서 떨어진 방울이 운동화 앞코를 적셨다. 충전을 기다리는 대기열은 늘 길었다.

모두에게 5분이 주어진다면, 그 5분을 차지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누구의 것일까?

나는 편의점 문 안쪽에서 진열대에 기대서, 방금 결제한 삼각김밥 영수증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충전대 뒤편, 모서리가 벗겨진 카드 단말기가 삑 하고 울리며 다음 순서를 알렸다.

내 앞의 남자는 전동 킥보드 배터리를 두 개나 얹었다.

“두 개면 10분이죠?”

직원이 묻자 남자가 웃었다.

“아뇨, 두 개라도 5분이죠. 동시에 넣을게요.”

동시에 충전되는 세상에서, 동시에 도착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다.

내 휴대폰이 울렸다.
— 어디야? 비 많이 온다.
— 충전만 하고 갈게, 5분.
— 그 말, 오늘만 세 번째야.
메시지 창 위로, 지난 약속들의 지도 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늘 가까웠고 늘 멀었다.




우리는 서로의 주소록에서 ‘즐겨찾기’로 묶여 있지만, 오늘 나는 그 즐겨찾기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가 오면 교통은 느리고, 느리면 마음은 조급해진다.

나는 조급함을 달래려 더 빨라지는 것을 선택했고, 그게 오히려 늦어지는 길이라는 걸 요즘 따라 자주 잊는다.
편의점 스피커에서 비 오는 날 할인 안내 멘트가 흘렀다. 젖은 머그컵 같은 목소리였다.

내 뒤에 선 아이는 우비 모자 안에서 귓불만 내놓고, 충전대의 초록 불을 멍하니 세고 있었다.

“아저씨, 저거 다 차면 불 꺼져요?”

“응. 다 차면 꺼져.”

“그럼 아저씨 마음은 언제 꺼져요?”

아이의 질문은 장난 같았지만, 내가 알아서 마음 충전을 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은근히 찔렀다.

휴대폰 화면 오른쪽 상단에 떠 있는 배터리 아이콘이 17%을 나타냈다.

내 마음의 배터리는 몇 퍼센트일까?

그 수치를 말해주는 버튼은 없었다.




내 차례가 오자, 직원이 내게 작은 카트리지 같은 배터리를 내밀었다.

이 도시에서는 충전이 아니라 교환이 더 빠르다. 다 쓴 것을 빼고 가득 찬 것을 꽂는 방식.

도시는 빈 부분을 싫어한다. 빈자리, 빈 시간, 빈 말을 메꾸는 데 능하다.
나는 충전 슬롯을 열고 새 카트리지를 밀어 넣었다.

손끝에 전달되는 클릭 소리가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이것 하나로 200킬로를 더 갈 수 있다지만, 내가 가야하는 건 단지 몇 정거장에 불과했다.

— 비 때문에 택시가 없네. 그냥 천천히 와.
그녀가 보낸 메시지는 이상하리만큼 다정했다. 천천히 오라는 말은 종종 빨리 오라는 말보다 무겁다.

마음이 급할까봐 하는 배려인데, 나는 그 배려 안에서 더 자주 길을 잃는다.

천천히- 라는 말은 목적지보다 마음을 먼저 돌아보라는 뜻일 텐데, 나는 그 마음을 자주 놓친다.
충전기 LED가 한번 크게 깜박이며 ‘준비 완료’를 알렸다. 나는 결제를 눌렀다.

영수증이 다시 나왔다. 얇은 종이가 뜨거운 감열 헤드를 지나며 또박또박 딸려 나왔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영수증에는 시간, 결제금액, 포인트, 적립 불가 사유가 적혀 있었다.

우리 사이에도 적립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우산 위로 택배차 물보라가 튀었다. 차선 가장자리에서 킥보드 둘이 달렸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는데, 모두가 서로를 지나쳤다. 이런 날은 작은 실수들이 쉽게 사고로 번진다.

나는 교차로에서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우리가 자주 다퉜던 순간을 떠올렸다. 언제나 시간이었다.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말하는 것도 미안해서 그렇지.”

'그래도 말해줘.'

“알겠어.”


비상 메시지가 떴다.
— 근처 공용충전소 서버 지연. 일부 대기열 재설정.
대기열이 밀리면 5분이라는 단위의 단가가 오른다.

5분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나는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손등의 온기가 유리로 옮겨 붙었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괜찮아. 비 많이 오지?'
“응. 조금 밀려.”
'빨리 오려고 하지 마.'
“알아, 5분만...”
'그 말, 네가 나에게 하는 말일까. 네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그 질문이 비보다 조용하게 가슴팍을 두드렸다.




비닐우산 위로 네온사인이 번진다.

공용 충전기의 초록 불이 일제히 켜졌다 꺼진다.

나는 구겨진 영수증 뒷면에 ‘5분’이라고 쓰고 다시 접었다.

우편함 광고지 사이로 너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착하지 못한 편지를 자주 보낸다.

발신 시간만 정확하고, 수신 시간은 늘 유동적이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 뜨거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는 뜨거운 것을 오래 들고 있는 버릇이 있었다.

말이 막히면 컵을 들어 올렸다 내려놓았고, 그 사이 나는 조바심을 달래며 사탕 포장을 벗겼다.

그때도 나는 “금방 올게”를 자주 말했다.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대응했다.

'그럼 나는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은 처음엔 다정한 약속처럼 들렸고, 시간이 지나자 묵은 냄새가 났다.

천천히 있는다는 건 곧 혼자 있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기도 해서였다.


나는 요즘, 느린 것들의 목록을 만든다.

비누가 닳는 속도, 아파트 복도 끝까지 비가 차오르는 속도,

현관 키패드의 삑 소리가 사라지는 속도, 말이 미안으로 변하는 속도.

그 목록의 끝에 우리는 늘 서 있었다.

빨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천천히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배우는 속도였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천장에 달린 작은 바람개비들이 돌아갔다.

이 건물도 옥상에 작은 발전기를 올려놨다.

비 오는 날에는 빗물 배수와 풍력, 배터리 관리가 하나의 리듬처럼 돌아간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의 절반만 이해한다.

나머지 절반은 그냥 눈으로 본다.

작은 바람개비는 일정하지 않은 비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 우산봉에 끼우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5분이라는 단위는 왜 이렇게 마음을 가볍게 만들까.

< 5분만, 5분이면, 5분 후에 >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실패해도 덜 아픈 시간.

하지만 덜 아픈 건 덜 미안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올라가?”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응. 내려오지 마. 나한테 한 말 그대로 할래. 천천히 있을게.'


문자 뒤에 점 하나를 찍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웠다.

점 하나가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날이 있다.




현관 문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삑.

마지막 ‘삑’이 길게 늘어졌다.

손끝이 차가워서 정확히 누르지 못했다. 다시 눌렀다.

삑 소리가 이번엔 또렷했다.

안쪽에서 문지방 긁히는 소리,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반갑다는 듯 고양이 밥그릇이 살짝 울리는 소리.

그녀는 거실 불을 켜지 않았다.

창밖의 네온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방바닥에 색을 뿌렸다.

'늦었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응.”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둘 다 많이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식탁 위에 종이 영수증이 몇 장 놓여 있었다.

오늘 내가 쥐고 온 구겨진 영수증과 닮았다.

나는 무심코 그 영수증 한 장의 모서리를 엄지로 비볐다.

종이는 체온을 쉽게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비비다 보면 가장자리에 살짝 습기가 스며들었고,

그제서야 종이는 내 손의 온도를 조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 내일 일찍 출근이야.'

그녀가 먼저 말했다. 나는 안다.

그녀의 출근이 일찍이라는 건, 오늘 밤 더 오래 깨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알고 있어. 그래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나는 ‘5분’이라는 말을 삼켰다. 그 말은 오늘 안에서 이미 여러 번 닳았다.

“근데 오면서 생각했어. 나, 5분을 너무 쉽게 썼던 것 같아.”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가방에서 구겨진 영수증을 꺼내 식탁에 펼쳤다.

감열지 특유의 냄새가 났다.

“이거 봐. 오늘 충전 영수증만 세 장.”

그녀는 웃더니 곧 진지해졌다.
'너, 5분마다 조금씩 미안해지지?'
“응. 그러면 5분마다 조금씩 자신을 설득해. 금방이면 괜찮다고.”


우리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와 냉장고 모터 소리가 중첩되었다.

그는 내게 컵을 건네며 따뜻한 물을 따라줬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자,

비로소 조금 천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오늘은 빠르게 사과하지 않을래.”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럼 어떻게?'
“늦은 만큼, 천천히 말할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고, 5분을 핑계로 마음을 대충 다루지 않을게.”

'그 말, 5분 걸렸네.'
“응. 그리고 앞으로는 5분을 아끼려고.”
그녀는 내 손에서 영수증을 받아 반으로 접었다. 접힌 선이 흐릿하게 남았다.

우리는 그 선을 따라 한 번 더 접었다.

종이는 작아졌지만, 그 종이에 작은 약속을 적기에는 충분했다.




모두가 빨라진 도시에서, 우리는 느려도 되는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다음번 5분은 충전이 아니라 서로의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