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에서 온 엽서 >

기억 백업 센터 : 기억을 백업해드립니다

by 톨루엔

‘지우개’

엄마는 버스 창문에 이마를 살짝 대고 졸았다.

손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대파·두부·바나나

잊지 않으려는 작은 목록이,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의 이름과 묘하게 어울렸다.

『 기억 백업 센터 』

나는 창밖으로 미끄러지는 비 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기억은 잡고 있어야 살 수 있고, 어떤 기억은 놓아야 살아진다.

문제는 그 경계가 늘 흐릿하다는 거였다.




센터 로비는 마치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접수대 옆 고무나무 잎이 번들거렸고, 카페인 냄새가 아주 약하게 났다.

직원은 조용히 동의서를 건넸다.
“고객님 본인 동의, 가족 열람 범위, 백업 제외 항목 체크 부탁드립니다.”
엄마가 펜을 잡는 손이 잠깐 떨렸다.
“열람 범위는 ‘본인만’으로.”

“백업 제외 항목은요?”

직원이 물었다.

엄마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작년 겨울 병원 날. 그날은… 빼고요.”
나는 입에서 ‘왜’라는 말이 나올까 봐 혓바닥을 깨물었다.

왜를 묻지 않는 것이 오늘 내 역할이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동의서 오른쪽 아래,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잊을 권리 요청 시, 기록 일부는 비가역 처리됩니다.

엄마는 체크박스에 표시를 했다.

작은 네모에 검은 V가 들어가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며칠 전, 엄마의 귀에는 작은 도우미가 꽂혀 있었다.

귓속에서 하루의 순서를 부드럽게 읊어주는 기계였다.

10시, 혈압약. 3시, 산책. 7시, 물 200ml.”
나는 그걸 보며 안도했고, 동시에 꺼림칙했다.

“이게 있으면, 내가 잔소리를 덜 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한 순간,

잔소리와 돌봄의 경계도 흐려졌기 때문이다.

“엄마, 밥 먹었어?”
“먹었지.”
“약은?”
“그것까지 물으면 잔소리지.”
“걱정돼서 그래.”

“기계가 말하면 돌봄이고, 네가 말하면 잔소리냐.”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기계는 상처를 덜 남기고, 우리는 자국을 남긴다.

그렇다고 자국이 늘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자국이 어떤 모양이냐가 문제다.




어제 저녁,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기억, 다 백업하는 게 맞지 않아?”
“엄마가 제외하겠대.”
“왜?”
나는 다시 물었다.
“작년 겨울 병원 날을요? 그건 아빠 마지막이잖아.”


부엌에서 밥솥이 ‘띠링’ 소리를 냈다. 스테인리스 뚜껑의 김이 잦아들었다.
“우린 기억으로 살지.”

동생이 말했다.
“엄마는 기억 때문에 못 살았대.”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집의 다른 부엌에서 같은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밥솥 모터, 국 끓는 소리, 한숨.
“그럼 아빠가 사라지는 거잖아.”
“아빠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장면이 사라지는 거지.”
동생은 끝내 말이 없었다.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전체를 삼키는 재주가 있었다.




상담실은 작았다. 선반에 머그컵과 컵 받침이 차분히 꽂혀 있었다.

상담사는 멀리 있는 단어를 잡아오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했다.
‘잊을 권리’를 요청하셨네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얼굴을, 내 안에서 지우고 싶어요.”
“사람의 얼굴을요?”
“아니요. 내가 그날 지은 얼굴요.” 나는 그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엄마는 아빠의 얼굴이 아니라, 그날 울지 못한 자기 얼굴을 지우려 했다.

눈물 대신 종이컵을 쥐던 손, 말 대신 침묵을 삼키던 입술.
상담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후회도 함께 줄어들까요?”

“몰라요. 알아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요.”
엄마의 목소리가 컵 받침만큼 얇게 떨렸다.
나는 그제야 ‘왜’를 뱉지 않기로 한 결심이 흔들렸다.

“엄마….”
상담사가 내 쪽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지금은 묻지 말라’라고 말하는 듯 했다다.



바닷가 사진. 해가 질 무렵, 모래 위에 놓인 파란 돗자리.

사진 뒤에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다.

조개껍데기가 발에 밟혔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오늘의 모래는 어제의 파도를 잊은 듯이 평평하다.


엽서의 귀퉁이가 닳아 흐릿해졌다. 누군가 주머니에서 자주 꺼냈다는 뜻이다.





백업 절차는 의외로 단순했다. 엄마가 가져온 상자 몇 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낡은 카세트 테이프, 오래된 병원 안내표, 아버지가 적어준 생선구이 레시피, 고무줄로 묶인 편지.

직원은 하나씩 사진을 찍고, 간단한 설명을 달라고 했다.

“이건, 그 사람이 가르쳐준 굽는 순서.”

엄마가 레시피를 가리켰다.

“이건, 내가 병실에서 산책 나간 시간.”

안내표에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건, 그날 못 울어서 밤에 혼자 들은 테이프.”
엄마가 카세트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뗐다. 표면의 플라스틱은 체온을 잘 받지 않았다.


“이걸 남길까요?”

직원이 물었다.
엄마는 잠깐 눈을 감았다.

“남겨요. 다만 내가 열람하지 않게.”
나는 그 말에 심장이 약간 움찔했다.


남기지만 돌아보지 않기, 백업한 다음엔 열어보지 않기.

사람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는 방법이었다.




센터 한쪽에는 ‘지우개’라고 적힌 서랍이 있었다.

모형이었지만, 손잡이를 쥐면 약간의 반발력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물리적 지우개가 있는 건 아니고요.”

“비공개·영구 폐기·시간 차단, 세 가지 중에 선택하시는 거예요.”
엄마가 다시 ‘본인만’ 칸에 체크했다.


“나는 시간 차단.”

“몇 시점을 기준으로요?”

“…작년 겨울 병실 문 앞.”


나는 엄마의 선택이 무서워지려는 순간, 그 옆의 작은 글씨를 읽었다.

시간 차단: 특정 시점 이전/이후 기억 접근을 잠시 멈춥니다. 원하면 다시 열 수 있습니다.

엄마가 내 눈을 힐끗 보았다.

“나, 완전히 없애고 싶은 건 아니야. 그냥, 오늘사가 덜 흔들리는 정도로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잊으려는 게 아니라, 지금을 덜 흔들리게 하려는 거였다.

마치 비 오는 날 베란다에 물기를 닦아두는 일처럼, 미끄러지지 않게.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냉장고에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대파·두부·바나나

이번에는 옆에 작은 글씨가 더해졌다.

오늘의 숨


“그건 뭐야?”

“오늘 숨쉴 일을 적어보려구.”

“어떤 거?”

“바나나 껍질 얇게 벗기기. 두부를 살짝만 누르기. 대파 하얀 쪽부터 썰기.”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게 숨이야?”

“작은 숨.”

엄마가 말했다.

“큰 울음 대신.”

그 말이 차창에 맺힌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센터에서 받아온 열람 카드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본인 열람 전용

나는 그 카드를 뒤집었다. 다른 면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기억은 물건처럼 닦아지지 않지만, 사용할 순 있습니다.

엄마가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놓았다. 창밖으로 비가 얕아지고 있었다.




저녁, 이모가 전화해왔다.
“언니가 그날을 빼겠다고?”
“엄마가 결정하셨어.”
“그건 배신이야.”
엄마가 전화기를 내 팔에서 조용히 가져갔다.
“배신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내가 나를 붙잡아주려는 거야.”
“그럼 우린?”

이모의 목소리가 매말랐다.
“너희는 너희 방식으로 붙잡아. 나도 내 방식으로 붙잡을게.”

전화를 끊고 엄마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하얀 방에 바람 소리가 약간 스며들었다.
“네 아빠를 지우는 게 아니야.”

엄마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그날, 울지 못한 얼굴을 지우는 거야. 그 얼굴이 자꾸 오늘을 흔들어서.”
나는 그제야 엄마의 백업과 지우개가 같은 문장 안에서 공존한다는 걸 이해했다.

남기는 것과 놓는 것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다.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짝이었다.

우리는 서랍장에서 오래된 테이프를 하나 꺼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잡음 사이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흘렀다.

아빠의 소리 같기도, 모르는 사람의 소리 같기도 했다. 엄마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당신.”

엄마가 마이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내가 울어. 지금의 얼굴로.”

우리는 잠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녹음 테이프의 돌아가는 소리가, 오래된 벽시계 초침처럼 방 안을 맴돌았다.




우리는 백업을 마치고, 지우개를 조금 꺼냈다.

남기지 못한 것들은 사랑으로, 남기지 않기로 한 것들은 숨으로, 각자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