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5에서 온 엽서 >

수소 정거장 : 멈추지 않은 버튼 하나

by 톨루엔


바람이 펌프 캐노피 아래를 스쳤다.


고막을 간질이는 가느다란 ‘쉬—’ 소리, 누군가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비상정지' 라고 적힌 빨간 버튼 덮개가 투명하게 빛났다.

진아는 장갑을 낀 채 그 버튼 위에 손을 얹었다 떼었다.

국경의 경보가 한 단계 올라갔다는 문자가 방금 도착했다.

저 멀리 하늘은 맑은데, 땅 위의 소리만 긴장되어 있었다.

“오늘은, 닫아야 할까?”

그녀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는 질문을 속으로 던졌다.




진아의 수소 정거장은 작은 역 앞, 편의점 하나와 세탁소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간판은 오래된 파란색이었고, 캐노피 아래 바닥은 매끈하게 닳아 반짝였다.

정거장은 늘 조용했고, 조용한 건 늘 불안과 짝이었다.


첫 손님은 새벽 배송차였다. 기사님은 가볍게 인사하고 연결구를 조심스럽게 맞췄다.

바닥의 노란 선 위에 바퀴를 정확히 올린 다음, 엄지로 ‘확인’ 버튼을 툭 눌렀다.

압력이 올라가는 동안, 작은 LED들이 순서대로 초록색으로 번졌다.
“오늘은 물건 많아요?”

진아가 물었다.
“아, 네. 국경 쪽 도시에, 의약품이랑 분유”

분유라는 단어가 카운터 안에서 작은 울림을 냈다.

진아는 카드 단말기 옆에 놓인 종이 영수증 롤이 거의 닳아가고 있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

“오늘은 조금 바쁘시겠네요.”
기사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바쁘면 다행이죠. 멈춰 서는 날이 더 무서우니까.”




9시 정각, 휴대폰이 ‘띠—’ 하고 울렸다. 며칠 전부터 바뀐 경보음이었다.

톤은 낮아졌고, 작지만 길었다.

화면에는 '접경지역 주의, 비필수 이동 자제'라고 떠 있었다.


세탁소 주인은 문간에 서서 하늘을 봤다.

이런 날은 손님이 줄고, 줄어든 매출은 종이 봉투의 바닥을 더 얇게 만든다.

“문 닫을 거예요?”

주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진아는 익숙한듯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닫으라면 닫아야죠.”

그녀는 빨간 비상 버튼 덮개를 한 번 더 올렸다가 내렸다.

덮개가 올라갈 때 나는 작은 마찰음이 귓속에 오래 남았다.

그 덮개는 지난겨울 눈 오는 날에도, 한여름 더위에도 한 번도 눌린 적이 없다.

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언제부터인가 위로이자 불안이 되었다.




정오 무렵, 흰색 밴이 들어왔다. 차 옆면에는 스티커가 조심스럽게 붙어 있었다.

지역의료 네트워크

젊은 운전자는 차문을 닫고 허리를 숙였다.

“제가 직접 연결할게요.”

그는 조심스럽게 건식 연결구를 돌리고, 잠금 링을 확인했다.

손놀림은 익숙했고, 표정만 초보 티가 났다.


“의료 물자 배송이에요?”

진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아용 산소 팩과 소독 패드. 오후 다섯 시까지 저쪽 군 보건소에 넣어야 해서.”

“편도로만 가나봐요?”

“네. 근데 돌아올 때 비우면, 내일이 막힐 수도 있다고 해서요.”


‘막히다’라는 말은 도로도, 마음도 가리켰다.

진아는 그 말이 의미하는 두 곳을 동시에 떠올렸다.

하나는 접경을 향한 국도, 다른 하나는 집 현관의 키패드.




주입이 진행되는 동안, 정거장 스피커에서 안내 멘트가 흘렀다.

"안전 거리를 유지해주세요. 연결구를 임의로 분리하지 마십시오."

바람이 멘트를 조각내어 가져갔다.

그때, 진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 엄마, 집에 언제 와?

아들 민수가 학교에서 보낸 메시지였다.

— 저녁 전에.

— 오늘 축구 하기로 했잖아.

— 알지. 약속 지킬게.


‘약속’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민수에게 약속은 아직 수학 숙제처럼 명료했고, 진아에게 약속은 가끔 눌러야 할 비상버튼처럼 무거웠다.

젊은 운전자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요즘 비상 덮개… 누른 적 있으세요?”

진아가 그를 보았다.

“아뇨. 한 번도.”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연결구의 ‘쉬—’ 소리와 겹쳤다.

“근데, 눌러야 한다면요?”

그가 다시 물었다.

진아는 덮개를 한번 바라보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걸 누를 땐, 이미 늦은 거죠.”




철길 옆 풀숲에 누군가 앉아 있다. 노란 재킷의 등에 작은 글씨가 있다.

안전

그가 꺼내 펼친 것은 종이 지도.

지도의 접힌 선이 많은 곳은 손때로 반짝이고, 경계선은 연필로 진하게 덧칠되어 있다.

바람이 한 모서리를 들어 올리자, 지도 아래에서 파란 색연필이 굴러나왔다.

누군가 경로를, 누군가 하루를, 조용히 덧그린다.




젊은 운전자는 글러브박스에서 종이 지도를 꺼냈다.

네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네비를 믿지 못하는 날이 있다는 뜻이었다.
“오래된 거네요.”

진아가 말했다.
“네. 선배가 주고 갔어요. 접경 쪽은 가끔 표지판이 바뀌거든요.”
그는 지도의 한 구석을 접었다 펼치며 말했다.
“이쪽 언덕길, 해 질 녘엔 안개가 빨리 내려와요. 거기서 돌아 나와야 해요.”
종이 지도 위에는 볼펜으로 작은 동그라미가 몇 개 찍혀 있었다.

정차 금지 . 검문 가능 . 우회

“근데, 비상 상황이면 연료가 넉넉해야 하잖아요.”

그가 덧붙였다.

“오늘은…가능할까요?”


가능할까요.

그 단어는 허락을 구하면서도 책임을 나누는 말이었다.

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다는 걸, 오래전에 배운 듯했다.




정오 이후, 경보 단계가 한 칸 더 올라갔다.

화면에 고압 시설 점검 권고가 깜박였다.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저녁 전까지만 하시죠. 상황 보시고, 위험하면 잠그시고.”

그 말은 곧,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이었고, 판단에는 늘 여지가 있었다.

여지는 바늘구멍 같아서, 누가 지나갈지, 누가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젊은 운전자는 연결을 마치고 계산대로 갔다. 종이 영수증이 또각또각 인쇄되었다.

감열지의 따뜻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필요해요. 오늘은…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아서요.”

그는 영수증을 접었다가 펴보고, 지갑에 한 번 더 접어 넣었다.

접힌 선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오후 네 시 반, 하늘이 갑자기 누렇게 변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스피커가 또 안내를 읽기 시작했다.

"현재 지역은 고압 시설 보호 조치가…"

마지막 단어가 바람에 씻겨 나가고, 경광등이 한 번 툭 켜졌다 꺼졌다.


그때였다. 정거장 입구에서 검은 SUV가 급히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연결, 바로 가능합니까?”

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대기표 뽑으셔야 해요.”

사내는 자신의 차량을 가리켰다.

“제가 먼저입니다. 응급 이송차예요.”

그의 말과 동시에, 젊은 운전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저도 의료 물자예요.”

둘의 눈빛이 정거장 바닥, 노란 선 위에서 부딪혔다.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고, 진아의 눈에 빨간 덮개가 들어왔다.

누르지 않아온 덮개. 눌러야만 끝나는 싸움들이 있었다.

그리고, 누르면 시작되는 다른 싸움들도 있었다.




진아는 카운터에서 나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둘 다 ‘응급’이면, 제가 고를 수 없어요.”
사내가 성급하게 말했다.

“저는 사람, 지금 환자를 싣고…”
젊은 운전자가 말을 이었다.

“저도 사람, 사람에게 갈 물자예요.”
둘의 말은 맞았고, 맞는 말 두 개는 그대로 두면 쉽게 부딪혔다.
진아는 빨간 덮개로 걸어갔다. 덮개를 들어 올렸다.

사내가 움찔했고, 젊은 운전자는 숨을 멈췄다.
“제가 이걸 누르면, 오늘은 다 멈춰요.”

진아가 조용히 말했다.

“대신, 한 대는 보낼 수 있어요. 절차상.”
“누구요?”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었다.
진아는 종이 지도를 바라봤다. 접힌 선, 동그라미, ‘우회’ 표시.

그리고 아침에 들었던 단어, 분유


“먼저 들어온 차부터 보낼 거예요. 기록대로.”

사내가 항의하려는 순간, 진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 차는 제가… 같이 가요.”

“같이요?”

“네. 제가 누르면 정거장은 잠기지만, 사람은 움직일 수 있어요. 안전 구역까지 동반 이동으로"


사내는 잠깐 말을 잃었다. 젊은 운전자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진아는 덮개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덮개를 번쩍 들어 올린 채,

내부의 작은 스위치를 옆으로 밀어 ‘부분 잠금’을 걸었다.

펌프 한 대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멈췄다.

정거장은 반쯤 닫히고, 한 대의 길이 열렸다.




젊은 운전자의 밴이 먼저 나갔다. 사내의 SUV는 그 뒤를 따라붙었다.

진아는 정거장 문을 임시 잠그고, 노란 조끼를 입었다.

현장 관리

캐노피 끝의 낡은 깃발이 찢어진 소리로 펄럭였다.


국도에 나서자, 바람 소리가 차체를 두드렸다.

젊은 운전자는 지도에서 표시된 우회로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사내의 SUV는 비상등을 켜고 거리를 유지했다.


진아는 무전기를 들었다.

“정거장 A-7, 부분 잠금. 차량 두 대, 의료 물자, 응급 환자. 서쪽 우회로로 이동.”

잡음 사이로 관제의 목소리가 흘렀다.

“확인. A-7, 귀소 시 보고.”


그녀는 룸미러로 자신을 보았다. 눈 밑이 다소 파여 있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누군가의 숨이, 지금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기울자 안개가 빨랐다. 지도에 동그라미로 표시된 언덕길에서,

젊은 운전자는 속도를 줄였다. 사내의 SUV가 더 가까이 붙었다.
“여기서 우회!”

진아가 손짓했다. 종이 지도의 접힌 선이 그녀의 손안에서 정확히 펴졌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자, 오래된 철교가 나왔다.

철교 아래 물살은 잔잔했고, 난간에는 누군가 붙인 '안전 제일' 스티커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진아는 그 스티커의 찢어진 테두리를 괜히 오래 보았다.


‘안전’은 언제나 반쯤은 벗겨진 채로 붙어 있는 말 같았다.




군 보건소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푸른 회색으로 기울어 있었다.

젊은 운전자는 물자를 직원에게 넘기고 짧게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SUV 문을 열고 들것을 내렸다.

안에는 창백한 소년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산소부터.”

진아가 말했다. 소아용 산소 팩이 소년의 옆에 놓였다.

작은 ‘쉬—’ 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후, 아이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사내는 고개를 숙였고, 진아는 종이 지도를 접었다. 접힌 선은 더 진해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 진아의 무전기가 다시 울렸다.

“A-7, 경보 단계 하향. 시설 운영 재개 가능.”

운영 재개. ‘가능’은 허락이면서 부탁이었다.

그녀는 정거장으로 돌아가면서도 덮개를 떠올렸다.

덮개는 아직 눌리지 않았다.

눌리지 않았다는 것, 오늘은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누르지 않은 버튼 하나로 오늘을 건넜다.

멈추지 않아서 간 것이 아니라, 멈출 자리를 함께 정해 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