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일 Nov 03. 2023

에세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국문과를 나와서인가 내 주변에는 글을 쓰는 친구들이 깨나 있다. 소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친구부터, 가사를 쓰거나, 잡지에 올라갈 글을 쓰는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들 중에서 유독 에세이를 싫어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친구들에게 에세이를 추천해주면 “나 에세이 별로 안 좋아해.” “나 에세이 싫어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냥 정말 에세이를 싫어해서 싫어한다고 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난 그 말속에서 자신의 특정한 이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발견했다. 그것은 에세이가 순수예술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은 순수예술, 상위 문화를 향유한다는 우월감의 표출이었던 것 같다.


 에세이를 싫어하는 친구들의 공통점은, 먼저 자기 자신이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속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적당한 수준의 감성을 지녔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대표적인 에세이의 형식인 감성 에세이를 보게 되면 너무 과한 감성이라는 생각과 함께 거부감이 형성된다. “예민하게 반응할 만한 일이 아닌데 너무 슬프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패션 우울증 아니야?”, “억지 감성으로 독자를 끌어모으려는 수작이 아닌가?”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어 자연스럽게 에세이 전체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된다. 그들이 에세이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글쎄, 편견에 사로잡혀있을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친구들이 에세이를 많이 읽어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다양한 종류의 에세이를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에세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퇴사 에세이라거나 우울증 에세이, 여행 에세이, 투병 에세이 등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에세이의 성격은 아주 다양하다. 정말 다양한 성격의 에세이가 있음에도 우리가 에세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연상되는 에세이 장르가 있다. 바로 “감성 에세이”다. 논리의 비약, 감정의 비약이 쉽게 일어나는 장르인지라 사람에 따라 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 애초에 요즘 말하는 "감성"이 감정의 비약을 얼마나 잘 유도하는지에 대한 단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인가, 나쁜글인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진심을 담은 글이라면 그것을 공유하는 일에는 당연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된 글이 아니라 하더라도, 혹여나 짜치는 글일지라도 그 글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로 됐다.


 물론 감성 에세이가 싫을 수 있다. 내가 가지무침을 싫어하는 것처럼, 감성을 버무린 에세이가 싫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친구한테 가지무침을 먹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른 느낌의 가지 요리를 추천해준 건데, 싫어할 만한 책이었다면 추천하지도 않았을 텐데, 평소에 가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가지튀김을 추천해준 건데, 가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가지 싫어해”라고 말하고 그를 기피하려는 친구들이 아쉽고 야속하다.


 말년병장 시절에, 외출을 나와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외박, 외출 때마다 들르던 지행역 근처 우리서점에서 책을 사고 서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까페에서 읽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었을 정도로 책은 술술 잘 읽혔다. 주인공이 기분부전 장애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데,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받은 진료의 녹취록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이 에세이의 주된 내용이고, 진료 당시의 심경을 말한다거나, 진료를 받고 나서의 생각, 어떤 상황이 자신을 이렇게 몰아넣었는지, 그리고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솔직하게 적어낸 일종의 투병 에세이였다.


 그 에세이를 읽으면서 작가의 고민에 내 고민을 투영해보기도 하고, 작가의 눈물에 공감하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핸드폰 메모장에 서평을 짧게 남겼는데, 그 서평의 내용은 이렇다. “너무 솔직해서 정말 고마운 책이다. 일탈을 통해서 행복을 찾아보자. 정신과를 가고 싶다.” 말년병장인 내가 정신과를 왜 가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책의 솔직한 고백은 분명 정신이 아픈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정신과를 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줬으리라.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을 보고 막연한 반감을 느낀 사람들이 정말 많다. 감정을 자극하려는 수작이 뻔히 보이는 제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죽음을 생각함에도 욕구에 휘둘리는 작가 자신을 자조적으로 재치있게 풀어낸 상당히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저 제목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과연 내 눈에 띄었을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분명 흥미로워 보이는 제목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잘 팔리기도 했고.


 제목만 보고 “죽고 싶다고 찡찡대는 감성 에세이인가?”, “이 책 때문에 저런 제목의 책들이 많아진 것 같아서 짜증나”, “ 왜 저런 책이 잘 나가는 거야?”, “전문성 없는 사람의 에세이를 굳이 읽을 필요가 있나?”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책들은 분명 각자마다의 의미가 있다. 반드시 글이 정교하거나 예술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자기 생각을 적는 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우리는 에세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시나 소설에 비해 에세이는 시험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국어를 공부할 때 수필(에세이)을 공부하지 않고 소설이나 시를 공부한다. 직접적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에세이에 비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든 에둘러서 말하는 시나 소설이 변별력 있는 문제, 즉 어려운 문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에세이는 비교적 쉬운 문항에 속하게 된다. 심지어 수능에서는 수필이 한 문제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를 볼 시간에 어려운 소설이나 시를 공부하는 것이 성적 향상에 더 나은 결과를 낳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에세이와 친숙해질 기회를 대입이라는 틀 안에서 박탈당하고 만다. 단지 변별력 있는 문제를 내기 힘든 장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래서 에세이라는 장르가 우리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낯선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나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에세이를 찾아 읽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장르의 글도 에세이만큼 작가의 경험을 통해 생긴 생각, 철학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이 없다. 시험 문제를 내기 애매할 정도로 글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사고의 확장에 있어서, 그 간편함에 있어서 에세이 만한 글이 또 없는 것이다.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정말 재밌다. 에세이를 읽으면 다양한 생각을 접할 수 있고,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것에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니 관심 있는 주제가 있다면 에세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덜어내고 그에 대한 에세이를 한 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


 이 글은 재밌게 읽었던 독립출판의 전설, 김봉철 작가님의 “마음에도 파쓰를 붙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책을 친구들에게 추천해주다가 실패해서 슬픈 마음에 쓴 글이다. 왜 읽으려고 하지 않는 걸까. 책도 그냥 빌려준다는데 말이죠. 내 이성적인 친구들이 맛있는 가지튀김을 먹어봤으면 좋겠다. 제발요~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의 재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