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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Feb 07. 2024

컵을 모으는 취미

 컵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 시작은 내 인생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던 19년의 호주 여행이었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방문하는 도시의 스타벅스 컵을 기념품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었고, 나도 그런 취미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크게 노력을 들일 것도 없는, 약간의 돈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취미였기 때문이다. 먼저 호주 스타벅스에서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와 페리, 시드니 타워가 그려져 있는 컵을 샀다. 가격은 2~3만 원 정도 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스타벅스 컵을 사면 어떤 음료든 크기 상관없이 한 잔을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비쌌지만, 마냥 비싸기만 한 느낌은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시드니 컵은 제 용도로 쓰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착오로 연필꽂이가 되었다. 다행히도 몇 년 뒤에 다시 어머니에 의해 구제되어 지금은 대용량 물컵으로서의 그 소명을 다하고 있긴 하다. 


 호주 여행을 갔다 온 해에 대학교 친한 형과 함께 일본 후쿠오카를 가게 되었다. 거기서는 지역축제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 당고, 튀김 등이 그려져 있는 스타벅스 후쿠오카 컵을 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 컵은 어머니 전용 커피 컵이 되었다. 안에 커피 때가 가득 탈 정도로 뭘 많이 타 드셨다. 내가 사 온 컵을 어머니가 잘 쓰시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해외에 나가 스타벅스 컵을 살 수가 없었다. 코로나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스타벅스 컵을 사는 게 아닌, 정말 본격적으로 컵을 모으기 시작한 건 우리 집에 네스프레소 캡슐커피머신을 들이게 된 이후였다. 별안간에 나는 커피 맛의 차이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원두, 로스팅, 분쇄도, 에스프레소 머신에 따른 차이.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커피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까페마다의 커피 맛 차이밖에 알지 못할 터였다. 까페에 갈 때마다 원두의 종류와 배전 상태, 머신 이름 같은 걸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 했겠지만- 전에 사둔 비알레띠 모카포트가 있었지만 1인용 모카포트라 어머니 아버지 것까지 드리려면 만들고 뒷정리까지 하는 데에 족히 30분은 걸렸다. 그렇다고 혼자 커피를 내려 먹을 정도의 낯짝은 없었다. 그래서 점점 모카포트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가격도 비싸고 관리도 힘들어서 메리트가 없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다 보니 내 상황에 가장 알맞는 커피 추출 기구는 캡슐 머신 뿐이었다. 캡슐에 들어있는 원두의 특징을 미리 알고 그 맛을 분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커피를 타 드시는 어머니에게 캡슐 머신이 있으면 좋은 이유를 계속 말씀드리며 구매를 유도했다. 캡슐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되고, 라떼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맛도 타 먹는 커피보다 좋을 것이며, 캡슐 가격도 6~700원밖에 안 하고 뭐 이런 것들. 어머니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는지 흔쾌히 사주셨다. 내가 사드렸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정말 돈이 없어(핑계) 그러지는 못했다. 네스프레소 픽시 모델과 함께 에어로치노 4도 샀다. 에어로치노는 거품기인데, 우유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차가운 우유 거품을 만들 수도 있고, 따뜻한 우유 거품도 만들 수가 있다. 10만 원이 넘는 가격의 거품기라 살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지금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 라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캡슐커피머신을 들이고 나니 에스프레소, 룽고, 아메리카노, 라떼 등을 담을 다양한 용량의 컵, 다양한 감성을 가진 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컵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는 10년 넘은 킹콩부대찌개 컵이 있다. 아버지가 받아오신 건지 어머니가 가져오신 건지 그 컵은 우리 집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중학생 시절 내가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하신 아버지(성당사람) 몰래 교회에 다니면서 받아온 교회 컵도 있다. 되게 까페 컵처럼 생겨서 아직까지도 교회와 관련된 물건임을 들키지 않았다. 그 이쁘지 않은 컵을, 공짜로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가져왔었다. 지금도 킹콩부대찌개 컵과 교회 컵은 집에서 아주 잘 쓰이고 있다. 나는 어머니께 컵을 버리자고 말씀드리면서, 킹콩부대찌개 컵을 부숴버리면 다른 컵 쓰실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그러자면 어머니는 멀쩡한 걸 왜 버리냐며 날 막으신다. 뭐.. 멀쩡하고 또 유용하게 쓰인다지만 킹콩부대찌개 컵은 아무래도 버리고 싶어지는 물건이라 조만간 내 손으로 버리지 않을까 싶다. 


 먹어보지도 않은 킹콩부대찌개에서 나눠준 컵과 다니지도 않는 교회에서 나눠준 컵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사용했던 우리 집에서, 컵은 액체를 따라 마시기 위한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가풍 속에서 내가 컵을 사 오고 어머니께서 컵 가격을 들으시면 돈 아깝게 컵을 왜 사느냐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그 컵에 커피를 내려드리면 근사하다며 좋아하신다. 이쁜 컵은 분명 음료의 맛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좋은 선물이란 내 돈 주고 사긴 아깝고 남이 사주면 너무 좋을 그런 물건을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컵은 선물하기에도 부담이 없고, 받은 사람은 컵을 사용할 때마다 그 컵을 선물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 집 가족들에게 컵이라는 좋은 선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집에도 종종 손님이 오신다. 우리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하셔서 회사 사무실을 겸한 우리 집에 오시는 큰아버지나 어머니와 친한 보험 아주머니, 아버지 성당 지인분들, 정말 가끔 오시는 어머니 친구분들까지. 손님이 오면 마실 것부터 대령하는 것이 세계 공통으로 형성된 관례이기에 집에 있는 커피나 차를 준비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나마 괜찮은 잔을 고르시느라 애를 쓰신다. 결국에는 이쁘지 않은 컵에 음료를 담아 손님분들에게 드리신다. 실제로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느꼈다. 


 생활비 대부분을 자식들 좋은 거 먹이는 데에 쓰시거나 정말 필요한 곳에 쓰는 데에 익숙하셔서 컵과 같은 사치품에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내 컵을 자주 사용하셨으면 좋겠다. 컵으로 물을 드시든, 커피를 드시든,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쓰시든, 컵이라는 사치품에 돈을 쓴다는 배덕감을 내가 대신 느끼고 어머니는 그 배덕감의 결과만을 즐기셨으면 좋겠다. 


 이쁜 컵은 깨지지만 않으면 언제까지고 쓸 수 있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라 모으는 데에 실용성이 있다. 사치와 실용 사이에 있는 물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쁜 컵을 보면 뭘 담아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맛도 더 좋아지는 느낌이라 자연스러운 수분 섭취에 용이하다. 컵 받침이 세트로 있는 컵을 사용할 경우, 나를 아끼는 느낌이 든다. 굳이 컵 받침을 내온다는 것이 알게 모르게 사치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직접 산 컵을 보면 그 컵을 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 호주와 일본에 갔을 때 컵을 샀던 스타벅스 매장의 모습과 그 근방의 분위기, 자취를 시작한 여자친구를 위해 카네수즈 그릇을 선물하면서 동시에 내 카푸치노 잔도 샀던 기억, 캡슐 머신을 사고 라떼를 근사하게 만들어보고 싶어 쿠팡에서 싸고 이쁜 전형적인 형태의 하얀 라떼 잔을 산 기억, 새로 생긴 동네 소품샵에서 피너츠의 찰리 브라운이 프린팅된 잔을 샀는데 계산하려고 보니 그 가게의 주인이 중학교 동창이어서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 동네 빈티지 바에서 버번콕을 마시다가, 가게 한켠에서 팔고 있는 컵 받침이 있는 빈티지 유리컵이 마음에 들어 구매하려 했지만 2만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사지 않고 가게를 나왔는데, 계속 그 컵이 눈앞에 아른거려 영업시간이 끝났음에도 다시 돌아가 양해를 구하고 컵을 산 기억 같은 것들. 컵을 살 때의 나는 언제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행복할 때 컵을 산 건지, 컵을 사서 행복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컵들은 모두 행복한 기억으로의 매개체가 되어준다. 그래서 컵을 더 모으게 되는 것 같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그래서 모두에게 컵을 모으는 취미를 추천하고 싶다. 어렵지도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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