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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Mar 28. 2024

노출증 환자의 글.​

난 어떻게 보여지고 있을까? 남이 일상적으로, 보편적으로 나를 떠올렸을 때의 내 모습. 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 모른다. 인상이 좋아 보일지, 얼굴이 불어 있을지, 눈빛이 느끼해 보일지, 눈곱이 있을지, 말을 조리있게 하는지, 턱선이 살아있을지, 코털이 삐져나와 있을지, 어깨가 좁아보이진 않을지. (좁은 건 잘 알고 있다.)


매일 거울을 보는 데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어떤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까. 내가 바라는 나의 분위기는 있지만, 그게 구현되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멋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선 그와 걸맞는 라이프스타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궁금한 것은 이거다. 내가 타인에게 느끼곤 하는 두려움이 어떻게 발현이 되는지, 만약 그런 게 없다면 만만할 뿐이 아닌지. 글, 음악, 영상, 스탠드업 코미디. 직업도 없이 이리저리 예술이랄 것들에 발을 담그는 모습은 내가 볼 때에도 영 대단한 모습은 아니다.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발버둥을 치는 듯 보일테고, 그게 맞다. 그런 면에서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두려움은 아마 경외, 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가령 대학원에 간 친구들의 연습장, 그 속의 수식과 표현은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고, 좋은 길목에 이삭토스트를 차린 친구의 안목과 결단력은 놀라우며, 어떤 회사든 일주일에 5일을 출근해서 일을 하는 친구들의 성실함과 현실감각은 내가 애써 취업이라는 정도를 외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요식업에 몸을 담고 홀에서든 주방에서든 그 고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며 삶의 무게를 실감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래퍼 친구의 열정,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몰입 등, 그 모든 것들은 내게 뼈아픈 자극이 되고야 만다. 


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걸 해낼 자신이 없다. 동경에서 비롯되어 나에게로 부여되는 노력으로의 강제가 부담스러울 따름으로, 난 언제나 그보다 더 편한 길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그렇게 찾은 가장 편한 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삶의 방식은 편할지언정 즐거울 수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매사 자신감이 있는 편이지만 사람 노릇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스스로를 사랑하면서도, 잠재력을 느끼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마저도 소용이 없다 느낀다. 나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자존감은 낮고 자신감은 넘치는 셈이다. 비대한 자아가 현실의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요즘 사람답게 눈이 너무 높은 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별 볼 일 없는 지금의 나를 데려갈 회사 역시 분명히 별 볼 일 없을 테다. 


누군가는 정형화된 삶을 살아가지 않으려는 나를 추켜세워 줄 때가 있는데, 물론 진심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겸손, 겸양이 아닌 진심으로 그런 언사를 거절하고 있다. 칭찬을 받을 만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 걸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시작하자면 귀찮아져서 결국 그만두고 만다. 당장에 급한 빚이 있는 집안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취업이라는 길을 자꾸 미루기만 하는 것이 현재 나의 모습이다.  


이런 내가 창작을 통해 삶을 전시하는 방식이란 단지 관심을 끌기 위해 옷을 벗을 뿐인 노출증 환자의 그것과 동일하다. 결함을 드러내는 것이 용기로 비춰지기를 바라는 점이 그렇고, 보여줄 것이라고는 헐벗은 몸뚱아리 하나 뿐이라는 걸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하필 책으로 이러는 이유는 단지 유서 깊은 장르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서다. 책이라는 형식은 나의 치부를 거부감 없이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나 있을 치부를, 웬만하면 숨기려고 하는 그것을 심심한 텍스트로 중화한 다음,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만천하라고는 하지만 몇 명 보지도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이 소소한 충격으로 다가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충격은 누군가의 하루 이틀을 바꾸고, 나는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첫 책을 낸지 2년 쯤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책을 냈다는 사실이 썩 자랑스럽진 않게 되었다. 책을 내기 전이나 지금이나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글을 쓰는 건, 더 재밌게 내 몸뚱아리를 보여줄 수 있진 않을까 해서, 모두가 일하는 평일, 학생들 하교시간에 맞춰 벌어지는 이 바바리맨 짓이 언젠가는 행위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진 않을까 해서, 놀림 받을 걸 감수하면서까지 내 자질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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