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시간이 두려운 당신에게

by 일연

퇴근길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무심하게 탁 7층을 누르고는 엘리베이터 뒤쪽에 있는 커다란 거울로 습관처럼 얼굴을 살핀다. 이리저리 머리를 넘기며 얼굴을 바라보다가 순간. 반짝. 머리를 넘기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응? 이게 뭐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빛을 받아서 빛나는 윤기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빛나는 무언가. 설마라는 생각과 함께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알지도 못했던 사이 빼꼼히 나 있는 흰머리들. 가장 먼저 올라온 마음은 '아닐 거야'였다. 어쩌다 한 가닥씩 자라난 흰머리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나 있는 흰머리들을 본 순간 7층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빛에 비쳐 잘못 봤을 거야.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던 머리카락을 휘 덮어버렸다. 아무 일 없었던 거라고 태연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그깟 흰머리가 뭐라고.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온라인으로 회원가입을 할 때마다 태어난 연도를 찾으려면 우두두두 스크롤을 내려야 하고, 입사한 사람들의 태어난 해를 들으면 그게 학번이 아니던가요라고 되물을 때에도 타격감이 없었건만. 이상하게도 유독 그 흰머리들 앞에 무너져버렸다.


지나갔구나. 처음으로 젊은 날이 지나갔다는 감각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다는 감각. 떠나갔다는 느낌. 집에 들어와 자꾸만 무언가를 놓고 온 기분이 들어 가방 속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 책상 위에 올려보았다. 핸드폰, 지갑, 이어폰, 립글로스.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몇 번이나 가방을 뒤져 보아도 잃어버린 물건이 없었건만 자꾸만 무언가를 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은 얼마간 계속되었다. 당연히 나에게 있어야만 할 무언가를 어딘가에 놓고 온 기분.


젊음이, 시간이, 삶이 언제라도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너무 당연해서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잃었구나.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그렇게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누군가에게 속은 기분이었다. 내 곁에서 떠나간 무언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감각. 되돌릴 수 없다는 감각. 억울하고 두려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왔던가. 내가 흘려만 보낸 순간들은 어디로 흩어져버렸을까.


그 뒤로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 습관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집어넣었다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내렸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데 빼꼼히 고개를 들고 솟아나 있는 새싹이 보였다. 며칠 전에 지나치며 보았을 때보다 손가락 한 마디나 더 쑤욱 자라 있는 새싹이. 조금 더 고개를 돌리자 언제 터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만큼 웅크리고 있던 꽃 봉오리가 뽁 하고 터져 이제 피어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슬며시 웃고 있었다.


삶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흘러가는구나.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오늘도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나의 삶은 늘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계속 나아가고 있었구나. 그러다 문득 돌이킬 수 없는 이 순간을 이제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붙잡아 내 곁에 붙들여 앉혀 놓을 수는 없지만 이 순간을 붙잡을 수는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꾹꾹 눌러사는 것.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겠거니 시간에 몸을 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충만하게 채워 사는 일.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본다. 나는 지금 일흔 살이다. 그리고 지금 눈을 뜨면 나는 잠시 서른일곱의 몸으로 돌아와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 서른일곱의 하루를 살고 오라고 허락을 받았다. 눈을 뜨면 내 앞에 펼쳐지는 이 단 하루가.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그리웠던, 돌아만 가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오늘이 주어졌다. 나는 그런 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 오늘을 선물처럼 받았으니 찬란하게 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찬란하게 살아야지.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이 하루를.


휘몰아치는 일상에 숨구멍을 내어 굳이 길가에 핀 꽃을 들여다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퇴근길에 발길을 돌려 굳이 한강으로 달려가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지금 내가 오늘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이 삶을 선물처럼 가득 채워 사는 것. 그렇게 나는 지금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하루를 선물처럼 살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습관처럼 거울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휘 넘겨 여기저기 하얗게 올라온 흰 머리카락을 빤히 들여다본다. 내리쬐는 불빛에 비친 게 아니었구나.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해 족집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 둘 흰머리를 뽑거나 잘라내고는 빗으로 머리를 빗고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어젖혔다. 제법 쌀쌀하던 밤공기도 이제는 그 사이에 찾아온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 담겨있다. 봄이 왔고, 또 봄이 가겠구나. 그래도 이제는 이 봄을 찬란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는 게 편안해졌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요. 떠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떠나가고 봄이 왔구나 싶더니 이제는 벌써 그 봄 마저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아요. 성미가 급한 여름이 자꾸만 저 멀리에서 찾아올 준비가 되었다고 초인종을 누르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신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적이 있나요? 저는 자주 그래요. 해야 할 일들을 해내며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눌러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거든요. 흘러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서, 그러면 아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아쉬워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오늘이라는 하루가 우리가 먼 미래에서 잠시 하루만 다시 살고 오라고 보내준 선물 같은 하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자꾸만 미래로가 있는 마음을 여기로 데려와서 오늘을 눌러살다 보면, 그렇게 꾹꾹 눌러 산 하루가 가득한 뒤를 돌아보면, 올해의 끝에는 분명 지나간 시간들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마음껏 누려버려요. 우리 찬란하게 살아요. 그게 화려한 일상이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그냥 그렇게 우리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웃어버리고, 지나가며 보는 나뭇잎이며 길 가다 눈 마주친 강아지들에게 싱긋 웃어도 보고요. 시간 여행으로 다시 살게 해 준 오늘이라고 상상하면서요. 짜증 나고, 힘들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을 마주해도 우리 아주 싱긋 웃어버리며 오늘을 살아버리기로 해요. 저도 그럴게요.


일연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