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정말 변호사를 그만두고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도전할 것인가. 공채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스터디를 해야 할 텐데 로펌에서 일하며 그 과정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아나운서 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나자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고민 속에 보내다가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작은 가능성을 위해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당장 변호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평일에 이루어지는 면접에 몰래 다녀온다는 것은 연차 따위 쉽게 쓸 수 없는 로펌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나운서 학원만 다니면, 준비만 해보고 도전만 해보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나아질 줄 알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스터디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다음 과정은 내가 스스로 준비하고 해쳐나가야 하니까. 마치 대학 졸업 후 취준생의 길을 홀로 걸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규과정을 마친 후 공채시험에 지원하지 못 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는 회사에 다니면서 잊고 있던 제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그 결과 이직에 성공했답니다." 와 같은 성공신화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렇게 되자 잠시 우울해지면서 내가 헛돈을 쓴 것은 아닐까. 한두 푼도 아닌 학원비를 덜컥 결제하고 소중한 주말 시간을 들여서 과정을 들었던 것들이 시간과 돈의 낭비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안 좋은 생각은 어찌나 빨리 번지는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그 비용으로 다른 걸 했더라면 이라는 가정까지 해가면서 부정적인 생각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저 내가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밤늦게 퇴근한 후 집에 돌아와 방에서 혼자 그날의 뉴스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었다. 배움이 헛되지 않도록 내 것으로 체득하여 언젠가는 이 노력들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밤 12시가 넘도록 혼자 그날의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아나운서 학원을 다녔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신 분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방송국 작가분의 연락처를 전해주시며 한 번 연락을 해보라고 제안해주셨다. 처음에는 "네? 갑자기요?"라는 생각으로 주저했지만 이내 곧 '그래 자기 어필 시대에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작은 기회의 실오라기일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바로 그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나의 변호사로서의 이력과 짧은 소개 그리고 아나운서 학원을 다니면서 발음과 발성을 공부했다는 내용까지 짤막하게 적어서. 조금은 부끄러워 잠시 망설였지만 "기회는 빠르게 지나가고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기회가 기회인지 알아채는 것 또한 능력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보기와 달리 소심한 트리플 에이형인 나는 '괜히 보냈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며 핸드폰 액정 화면을 덮어놓고 핸드폰을 멀찍이 치워버렸다. 지잉- 진동이 울려도 보지 않을 거야 아 몰라.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작가님은 본인이 법률 관련 코너를 담당하고 있다면서 추후에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한편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며칠 후. 지잉- 며칠 전 연락을 주셨던 작가님의 연락이었다. "다음 주에 방영되는 법률방송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한참을 멍하니 액정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멈춰있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일을 또 저질렀어. 또 일을 벌였어. 아 나니아 뭐한 거냐 또 진짜.' 한참을 어버버 거리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그렇게 나는 정말 갑자기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에 갑자기 변호사로 방송에 나가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이건 '되어버렸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촬영 당일. 준비한 인터뷰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하는데 내 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자 PD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말씀하시는 게 정확하고 좋은데 너무 아나운서 같아서요 조금만 덜 아나운서처럼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 순간 내가 느낀 희열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받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저 말은 내가 생애 들었던 것 중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며칠 후 드디어 방송이 나가고. 나는 어플 효과 하나 없이 극히 사실적으로 내 얼굴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HD 화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침방송이 방영되는 내내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아 나는 못 보겠어 내 얼굴!!!! 꺄 목소리도 어색해 엄마 볼륨 좀 줄여서 틀어줘!!!"
첫 방송이 나가는 날 아빠 엄마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가 이른 아침 TV 앞에 앉아서 방송을 챙겨 보셨다고 한다. 방송 직전까지도 '에이 설마. 그냥 행인 1처럼 지나가는 거 아니냐?'라고 하시던 부모님도 내가 꽤나 길게 그 큰 TV 화면에 얼굴을 가득 채우고 나와서 한참을 법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시더니 "오 꽤나 나온다야. 변호사가 맞긴 하구나." (응?? 저기요??)
주위로부터 우연히 지나가다가 TV에서 봤다는 연락과 누가 봐도 급히 놀라서 찍은듯한 인증사진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멋있다. 축하한다. 잘했다. 는 칭찬들을 받으며 멋쩍은 웃음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던 중 친한 이들로부터 어김없이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한 코멘트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괜찮아 나 마음의 준비 다 했어 자 말해줘 봐.
그런데 그들로부터 돌아온 이야기는 "다 좋은데 너무 아나운서 같아. 좀 더 편하게 말해봐."
하하하. 그래요 제가 조금 더 편하게 부드럽게 말해볼게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은 너무나 소중했고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언들이었지만 그저 나에게는 들어도 또 들어도 이보다 기분 좋을 수 없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렇게 그다음 인터뷰가 이어지고 점점 조금씩 더 자연스럽게 발성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고 싶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방송에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무작정 준비를 하고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내가 생각한 것과 딱 떨어지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무렵 내가 전혀 생각지 못 했던 곳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고, 미친 척 용기를 내어 그 기회를 잡고 나자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내가 원하던 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발음과 발성을 배워서 어디에 쓰나. 복식호흡으로 정확한 발음을 구사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시간 낭비는 아닌가 라던 고민들은 이후에도 조금씩 헛된 시간들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에 우연히 필라테스 강사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단체수업을 진행할 때마다 큰 음악소리를 뚫고 모든 회원분들에게 정확하게 동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복식호흡으로 정확한 딕션으로 발음하며 내용을 전해야 했고, 이때에도 내가 배웠던 발음과 발성법이 큰 도움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뿐만아니라 내가 원하는 콘텐츠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카메라 앞에서 말하고 싶다며 시작한 유튜브 방송에서도 좀 더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내용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눈 앞에 기회가 보이지 않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들이 어디에 쓰일지 몰라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저 이것저것 역량만 키워가고 자기 계발만 하는 것 같아 답답했던 시간들. 기회가 오면 냉큼 잡아챌 준비는 되어 있는데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며 우울하게 보냈던 시간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멈춰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하루하루 나의 노력들을 쌓아갔고 그러한 노력들을 보고 찾아온 작은 기회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잡아채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원했던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저 꾸준하게 하나씩 하나씩 점을 찍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을 때 아름다운 별자리가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록 지금 당장 눈앞에 무언가가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한다면
분명 그 노력은 어떤 방향으로든 빛을 발하리라고 꼭 그렇게 믿으면서.
꿈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써본다면 분명 그 꿈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러는 말을 들었다. 내가 만약 "아나운서"가 되는 것만이 나의 꿈이고 목표였다면 나는 결국 '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나운서"를 꿈꾸었던 이유를 파고들어보면 나는 동사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하고 싶었고,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른 방법을 통해 이루었기 때문에 나는 이로써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다.
명사로 꿈을 정하면 그 직업을 가지지 못했을 때에는 모두가 실패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왜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목표를 동사로 정해본다면 수많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혹여나 나에게 다른 옷을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일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동사"로 써보고 그리고 지금 당장 눈앞에서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정성을 다해 점을 찍어나가보려고 한다. 어느 순간 선을 이어 보면 아름다운 별자리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져 있으리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