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5월의 봄날!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나름의 아들 된 도리를 하기 위해 어머니 아버지를 뵈러 가던 길이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던 길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장애물이 있는 쪽으로 내가 갑자기 돌진했다.
늘 가던 길이라 방심하고 잠시 딴생각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순간적으로 전봇대와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나의 얼굴엔 그 뜨거운 사랑을 기념하는 마크가 새겨졌다.
큰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어서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었지만 찌그러진 얼굴을 바라보고 놀라실 어머니 생각에 걱정이 밀려왔다.
역시나 단번에 알아채신 어머니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시며 내 상처의 연유와 내가 느낄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실제 내가 겪었던 사건 그리고 나의 아픔의 3천 배는 될 만큼의 마음으로 느낀다는 신호를 보내셨다.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표현을 보여드렸지만 안쓰러움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도 거짓 아닌 진심이었다.
처음 특수학교에 입학했을 때 연고는 나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혼자 돌아다닌 다는 것이 익숙하지 못했던 내게 예민한 감각이 있을 리 없었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깨지고 혹이 나고 부서지고 내 피부 여기저기는 끊임없이 연고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히 잘만 다니는데 기둥과 모서리는 늘 나에게만 불시에 나타났다.
오늘도 터지고 내일도 다치고 하면서 양호선생님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은 연고보다 마음의 위로였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안 보이는 것도 슬픈데 그 눈 때문에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살아야 하는 내 팔자가 억울하고 서러웠다.
또 깨지고 또 다치고 또 억울하고 또 슬펐다.
한 통 두 통 연고의 빈 통은 늘어가고 내 몸 여기저기에도 상처가 늘어갔다.
내 몸 구석구석 반찬고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다쳤을 때쯤 내게도 부딪히지 않고 다치지 않는 날들이 다치는 날보다 많아지는 시기가 왔다.
생각해 보면 연고와 단짝으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처 조금 생겼다고 그리 서러워할 것도 없었다.
내가 부딪히며 다녔던 것은 원초적으로 내 눈이 보이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보행훈련을 덜 받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였다. 다른 친구들은 잘 다니는 길을 혼자만 부딪히며 다닌다는 것은 슬퍼할 일보다는 조금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다친 부위들도 며칠 지나면 대체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별것 아닌 작은 것들이었다.
다만 아직 나의 마음 상태가 보이지 않는 작은 다름을 너무나도 큰 좌절로 보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넘어지는 것도 공부가 안 되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기분이 울적한 것도 괜스레 다 눈 때문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불쌍함의 틀에 가두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었다.
넘어지고 세상 무너진 듯 우는 것은 서너 살 먹은 아이 때 마스터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인간의 과제였다. 15살도 넘은 반 청년이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면서 그런 일은 별것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늘 전봇대와의 진한 스킨십을 겪으면서 내가 슬프지 않았던 것은 그것은 나의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세상 무너질듯한 좌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딴생각을 했고 운이 나쁘게 그 상황에 전봇대와 마주쳤을 뿐이다.
내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난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아파할 일도 아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조심하면 되는 일이고 상처는 며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살다 보면 작은 넘어짐이나 부딪힘을 겪는 일이 많다.
평탄한 길이나 내리막을 걷는 것처럼 늘 편안하면 좋겠지만 삶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길고 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번 마주할 다른 장애물을 부딪히거나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운다.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그 상처는 쉽게 아물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작은 상처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