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늘 지나다니던 에스컬레이터가 동작하지 않는 곳이 많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두 군데의 에스컬레이터가 모두 멈춰있어서 어정쩡하게 발과 지팡이를 대어보고 후다닥 걸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하나! 둘! 셋! 넷!" 습관적으로 계단을 세면서 오르는 편인데 오늘은 그 숫자가 꽤나 커진 다음에도 끝 계단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열하나열둘열셋..."
"스물하나스물둘스물셋!"
평소엔 열아홉스물이면 끝나던 계단의 개수가 서른을 넘기고 마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가만히 서 있기보다는 걸어서 올라가는 게 습관인데 그럴 때마다 이 기계는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면서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곤 했었다.
움직이려면 좀 빠르게 동작하든지 그렇지 않으려면 그냥 계단이 있는 것이 일정하게 오르기 편할 것 같은데 쓸데없이 공사하고 세금만 낭비한다는 생각까지 하곤 했다.
엘리베이터처럼 교통약자를 태우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그 녀석에게 좀 더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스무 걸음이면 오르던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을 마흔 걸음 넘게 걸려서 오르면서 뭔가 새로운 것이 깨달아졌다.
아무 역할도 하고 있지 않다고 여겼던 이 녀석은 매번 내가 걸어야 할 스무 걸음을 대신 걸어주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기계 덕분에 난 두 번 걸어야 할 걸음을 한 번만 걸으면 되었다.
그로 인해 난 10분 기다려야 하는 다음 버스 대신 출발하기 직전의 버스에 몸을 얹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출근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지 않고 여유 있게 도착했을 수도 있다.
덜 걷게 되어서 아껴진 에너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나에게 조금 더 활기찰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귀가하는 나의 몸상태를 조금 덜 피곤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을 것이다.
난 한 번의 움직임에서 그 작은 지원해 대해 감사하지도 못했고 그 크기에 대해 느끼지도 못했지만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날을 지나면서 내가 받은 도움은 그 크기가 실로 작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난 수많은 지지와 지원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가족이 없다면 내가 가진 당당함은 많은 부분 위축될 것이고 직장의 동료들이 없다면 내 업무의 안정성 또한 보장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친구가 없다면 난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느껴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국가의 지원이 없다면 내 인생은 그 자체로 불안했을 것이 자명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수많은 삶의 에스컬레이터들은 나를 밀어주고 당겨주고 올려주고 있음을 난 새삼 깨닫는다.
에스컬레이터의 걸음이 스무 걸음에서 마흔 걸음이 되어서야 난 그 존재의 감사함에 대해 느꼈지만 그것은 어느 틈에 또다시 잊히고 희미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에스컬레이터들에 대해 똑같은 실수를 범한다면 그건 내게 있어 너무나도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어머니께 아버지께 동생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나의 에스컬레이터가 되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새기고 또 새겨야겠다.
절대로 고장 나지 않도록 나 또한 그들에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튼튼한 에스컬레이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