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캐슬'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by 안승준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한 '스카이캐슬'이 종방 했다.


드라마나 tv연속극에 큰 취미 없는 내가 시각장애인용 화면해설 찾아가며 뒤늦게 정주행 하며 스토리를 쫓았던 건 참으로 오랜만의 사건이었다.


단순한 호기심도 있었고 명절 가족들과의 대화 속에서 홀로 문화지체가 되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것에 끌린 이유는 도대체 어떤 메시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적으로 그 드라마만 보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돈, 명예, 권력 따위를 맹신하고 스스로의 인생과 자식의 모든 것까지 올인하는 주인공 가족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우스꽝스러울 지경이다.


태어나고 20년간의 시간들은 초단위로 쪼개어져서 서울의대만을 향한다.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된 살아남은 어른 종족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해 또다시 모든 것을 걸고 그 끝은 언제나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한다.


그들은 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취가 행복의 정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마실수록 갈증을 더해가는 탄산음료처럼 중독성 강한 허상일 뿐이다.


3대째 의사 가문이라는 100년의 목표점 가까이 서 있는 한 노인의 표정에 여유 있는 미소 한 점 찾아볼 수 없다는 건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증하는 강력한 근거이다.


그들은 끝내 꼭대기에 오르지도 못하지만 오른다 한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거기가 꼭대기인 것조차 모르고 더 오르려 허우적 댔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부를 독점하는 스카이캐슬 상류층 사회의 몰락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는지 모른다.


평생 한번 만져보기도 힘든 명품 그릇들과 값비싼 음식들을 먹어치우는 그들의 파티를 동경하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경쟁과 간교한 술수들로 그것은 큰 의미 없다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느 장면 그릇들이 산산조각 나고 주인공의 삶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릴 때 한 편 안타까웠겠지만 많은 이들은 그 순간 내가 가진 행복의 무게가 그 보다 낫다는 데에서 자기 주관적 최종의 의미를 찾아냈을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것 봐라! 입시경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돈과 명예는 부질없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한쪽에서는 극 중 수험생들이 먹는 건강보조제나 그들이 입는 옷과 반짝이는 그릇들의 브랜드를 검색해 보고 구매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드라마 속 부정부패들과 범죄적 추태들을 근거하여 캐슬의 삶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단죄하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건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위로이고 합리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리즈의 시청률은 국민의 3분의 1을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교육열 높은 부모님들이나 세상 꼭대기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인생관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스카이 캐슬'은 아니지만 난 우리 대부분이 각자의 성에 갇혀서 살아간다고 느낄 데가 많다.


장애인으로 살다 보면 적지 않은 시간 비장애인들이 쳐 놓은 높은 성벽과 마주할 때가 있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삶의 가치를 다수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은 비장 애성에 살아가는 이들의 격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견고한 작업이 된다.


케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우월의식은 누가 봐도 한 편의 코미디이지만 스스로와 다른 소수들을 도움받아야 할 대상이나 안타까운 불우이웃으로 단정하는 이들의 삶 또한 내가 보기엔 크게 다른 모양은 아니다.


수십억짜리 코디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지만 대형 종교단체의 삐뚤어진 종교지도자의 말을 전적으로 비판 없이 믿고 따르는 어떤 이들과도 매우 닮아있다.


소수들에 대한 혐오나 마녀사냥도 헌금 돼지들의 새 뇌들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승화한다.


부동산 거품을 말하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이들도 본인이 소유하거나 거주하는 지점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강남 사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강북 사람들도 지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보기에는 다 똑같은 '서울 캐슬' 주민일 뿐이다.


특수교육 교실에서조차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부모님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진도를 나가는 것을 불편해한다.


성적 좋은 아이들은 그들만의 성벽을 세우고 그곳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또다시 조금 더 불편한 아이들과의 경계를 세운다.


얼마 전 한 대기업 업 가문의 한 꼬마가 운전기사에게 퍼붓는 막말 동영상이 국민의 분노를 산 적이 있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 이전에 마치 왕족과 노예인 것 같은 그 장면을 한 기자는 갑질을 넘어선 '계급질'이라고 이름 지었었다.


'스카이 캐슬'의 피라미드도 어린 꼬마 녀석의 '계급질'도 다수가 공감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이지만 어느 순간 어느 공간에서는 우리의 모습이었을 수 있다.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유복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내겐 성적 나쁘거나 준비물 못 가져오는 친구들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었다.


그 친구들에게 난 재수 없는 '예서'였을 것이다.


실명을 하고 평균 정도의 경제 수준을 가진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현재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겐 내 삶은 또 다른 캐슬 안의 삶이고 그것은 내가 쳐 놓은 성벽으로 인한 것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극 중 대사에서 피라미드에서는 중간 정도가 가장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난 그조차도 스스로를 중간 정도라 느끼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바닥은 아니라는 최소한의 자기 위로를 주기 위한 또 하나의 경계 세우기라 느꼈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 더 나은 삶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노력하고 또 행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몸과 맘을 다하지만 그런 가운데 어떤 것들을 비판 없이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도 한다.


그것은 의미를 잃은 맹목이 되고 또 다른 합리화를 위해 경계를 만들고 성벽을 쌓는 시간이 된다.


'스카이 캐슬' 속 인물들은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우스운 캐릭터들이지만 그 안의 그릇들이나 장신구들처럼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력들이 평생의 발버둥이 향하는 곳이 그곳이라면 끔찍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전적으로 믿고 있던 많은 신념들이 캐슬의 벽을 쌓는 삐뚤어진 합리화를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철저한 코디의 계획이었다면 무섭지 않겠는가?


그들이 우습다면 우리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위, 아래가 아닌 꼭대기와 바닥이 아닌 다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성벽을 허물어야 모두의 성벽도 허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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