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혜균/아기의 손을 확인할 수 있는 초음파 사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경험 앞에서는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렴움이 앞선다. 처음 실명할 때나, 특수학교 입학하던 첫날에 비해서야 나아지긴 했겠지만, 여전히 낯선 도전 앞에서 작아진다.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들이 내게 시력이 없이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반복적으로 제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런 용기가 적용될 만큼 호환성이 크지는 않다. 다만 괜찮은 척 자신있는 척할 뿐이다.
아내의 출산을 며칠 앞둔 얼마 전에도 난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노력을 했다. 수술 뒤에 깨어나야 하는 아내를 돕는 것도,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날 신생아를 지키는 것도 오직 보호자 한 명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과제였다. 나 아닌 다른 가족에게 보호자의 책무와 권리를 모두 양도할 수는 있었지만 그건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할 가장으로서 용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병원에 사정을 말씀드렸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간호사 선생님은 출산 직후부터 모자동실을 원칙으로 하는 병원의 시스템에서 보이지 않는 내가 아이와 산모를 돌보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제 와서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병원을 옮길 수도, 내가 갑자기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새로운 상황 앞에서 언제나 그랬듯 그냥 최선을 다해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끌어내어 나의 정확한 상황을 알리고 받을 수 있는 도움을 찾아내려고 애썼고, 나는 나대로 다양한 채널로 공부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여 가려 노력했다.
출생의 날! 바로 그 결전의 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고, 찰나의 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아내는 분만장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발이 닿는 모든 곳의 길을 외우리'라는 마음가짐으로 긴장하고 있었지만, 분만장의 아내를 뒤로하고 병실로 혼자 돌아가야 하는 길부터 사실은 막막했다.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출입문마다 설치된 팔찌의 바코드 감지 센서는 그 위치를 찾는 것부터 어려웠다. 이리저리 더듬적거리면 어떻게든 팔찌를 터치하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어딘가에서 내게 시선을 두고 있을지 모르는 주변인들에게 불안한 나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런 고민을 하는 내게 분만실의 간호사 선생님은 "다음 수술이 없으니, 병실까지 가지 않으시고 분만실 밖 의자에서 계셔도 됩니다."라는 너무도 반가운 제안을 해 주셨다. 주춤주춤 어설프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 덕분으로 난 내 아들의 울음소리를 산모와 동시간에 들을 수 있는 특별 혜택도 누렸다.
사진찍기는 포기하고 울음소리 녹음 정도를 시도하고 있는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사진 찍어드릴게요. 충분히 시간 있으니 괜찮아요."라고 하시며 수십장의 사진과 몇 개의 동영상을 남겨주셨다. 편안한 마음으로 아가의 손과 발을 만지고, 숨소리를 공유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간호사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아가의 침대를 신생아실로 옮기고 가져온 짐을 병실로 옮길 때까지도 난 예상치 못한 도움으로 큰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고 수행할 수 있었다.
아내의 침대가 회복실을 지나 들어왔을 땐 미리 챙겨간 준비물의 도움을 받았다. 병실 밖 정수기를 찾기 힘들 때를 생각해서 캐리어에 2리터짜리 물을 몇 병이나 챙겨왔고 수건이나 세면도구도 꼼꼼히 챙겼다. 빨대 달린 텀블러는 아내에게 물을 먹여주기 위해 챙겼는데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름의 경험과 공부들로 어설프나마 아내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는 있었지만 잠시 후 내게 맡겨질 아이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초미세의 작업은 이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면에서도 극단의 두려움이었다.
"산모님은 누워 계셔야 하고 보호자님은 조금 불편하시니 괜찮으시다면 아가는 저희가 돌보아도 될까요?"
때마침 들어오신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의 제안은 내 허리를 저절로 90도로 꺾어놓았다. 갓 태어난 아가를 하루 종일 곁에 두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아가를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라."는 배려의 말씀으로 해소되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처형님은 틈나는 대로 나의 어려움을 살폈고 다른 간호사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들도 내가 가진 특수성이 아이나 산모의 어려움이 되지 않도록 충분한 배려를 해 주셨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가짐을 최대한 유지하려 애썼다. 병실 내에서라도 이리저리 물건을 찾고 나르고 아내의 불편함을 찾고 주무르고 도와주는 일쯤은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퇴원의 날이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내가 회복되고 아이가 건강할 수 있었던 건 아산병원 분만실과 신생아실, 그리고 66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의 맞춤형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지금 조리원에서도 햇살이에게 그리 어색하지 않은 아빠 역할을 해내고 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햇살이를 키우고 함께 놀고 지내는 시간 동안 내겐 또 다른 새로운 도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겠지만 오늘의 따뜻한 배려들은 또다시 용기를 내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한다. 낯선 경험은 나 아닌 누구에게도 자신 없는 떨림일 수 있다. 익숙한 이들의 도움과 배려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너무도 큰 힘이 된다.
내가 햇살이의 아빠가 되기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시고 도와주신 아산병원 간호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익숙한 내 삶의 궤적을 새로운 도전과제로 삼게 될 누군가에게 나 또한 배려를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